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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Apr 22. 2023

05   누군가 다녀갔다




누군가 다녀갔다

 장명흔

 

도서관 책 속으로 누군가 다녀갔다

살며시 문 열고 들어와 구석에 머물다 간 자리

책의 절반쯤, 책장과 책장 사이

의자에 걸터앉은 흔적처럼

긴 생머리카락 한 올 책갈피에 끼어 있다

누굴까

누구였을까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궁금해진다.

고개를 떨군 채 버릇처럼 머리를 매만지다

손가락 빗질을 한 것일까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돼 구석을 만들었을까

오른쪽 면이 주글주글하다

어룽룽 눈물꽃 피었다 진 자리

행간 어디에도 슬픔을 말하지 않는데, 여자는

책장과 책장 사이에 울음을 끼워 놓았다.

그 슬픔을 발견한 나는 크게 울고 돌아가

하루를 또 묵묵히 살아갈 어떤 여자를 떠올리다

오래전 호젓한 산책길에서

내 설움에 겨워

공벌레처럼 쭈그러져 울던 나의 울음이 떠 올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책의 절반쯤 되는

그 어떤 슬픔에 기대 있었다.

 

 

 

시작메모: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에서 종종 타인의 흔적을 보게 된다. 머리카락, 쪼그만 메모지, 심하게 그어놓은 밑줄,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언짢은 기분도 들지만 나도 모르게 감정에 휘말리게 될 때도 있다. 누군가의 머리카락 한 올을 순간 미묘한 감정에 휩싸여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그 여백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갇히게 된다. 문장에서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다 거기에 비친 자신의  그런저런 모습에 센티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썼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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