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 우직, 쎔직 그래서 내가 힘들직.
대쪽 같은 내 여보
대학 졸업 후 군대 제대하기 전, 1급 건축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단다.
제대 후, ‘라이프주택’이 첫 직장이었고, 아파트, 호텔 설계를 많이도 했었단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 잠실 롯데 호텔 구조설계를 맡아하고 있었고,
잠실 일이 종료된 후, 퇴근하고 들어오면 저녁 식사 후 바로 동네 도서실로 출근했다.
밤늦게까지 또는 새벽까지 공부하다 들어와서 자고, 아침에 출근하고를 6개월을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여서 나도 힘들었지만, 일하고 들어와서 공부하러 가는 사람은 더 힘들었을 테지.
그렇게 지독하게 공부하던 36살 여보는 독학으로 ‘건축사 자격증’을 한 번에 취득했다.
그 후, 건축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IMF도 잘 견뎌내며 작지만 나름 알차게, 알뜰하게 사무실을 운영했었는데 오히려 IMF 지나고 몇 년 후, 어려운 일이 있었는지 사무실을 접고,
집 옥탑방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던 중, 10년이 넘게 연락이 없었던 회계사 친구의 소개로 아산 테크노 벨리, 만 평이 넘는 공장 설계와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식구들이 모인 오랜만에 편안한 자리여서 여보야는 어지간히도 홀짝홀짝 많이 마셨었나 보다.
방에 들어와서 힘들다고 세상이 힘들다고 그래도 자긴 떳떳하다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맨 정신으론 할 수 없는 얘기였나 보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큰 공사 현장에선 뇌물 유혹도 너무나 많았단다.
맘만 먹으면 몇 천만 원 챙기기는 일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자긴 그렇게 살기 싫었단다.
왜냐하면 할 말 다하고 큰소리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자기 주머니에 몇 백만 원이 들어있는데, 업자가 안 받겠다고 하니 던지고 가버렸단다.
도저히 받을 수가 없어서 돌려주려고 들고 다니는데 만날 수가 없어서 들고 다닌다고 했다.
언제든 현장에서 만나게 될 테니 꼭 돌려줄 거라고 했다.
"그래 돌려줘. 당신 큰소리치고 살아야지. 할 말 못 하면 속 터지잖아~ 그런 돈 없어도 사니까 꼭 돌려줘~" 몇 번이고 말했었다. 그래야 되고말고.
그런데 막내 동생뻘도 안 되는 회사 직원들이 자기를 의심한다고 했다.
처음엔 현장 사무실 직원들이 자기를 의심하는 눈치였단다.
그런 눈치 다 알면서도 참고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했단다.
어쨌든 현장에선 자기가 최고의 위치이고, 사장의 위임장 들고 와 있으니 할 것들을 찾아 열심히 소신껏 일 했단다.
한동안 그런 모습을 지켜 본 직원들은 자기 말이라면 껌뻑 죽었단다. 그만큼 신뢰를 쌓았단다.
그런데 이번엔 본사 계장, 과장들이 전화로 꼬치꼬치 캐 물었단다.
자존심 상해 죽겠다며 나이도 어린것들이 그런다고 너무 속상해했다.
의심부터 하고 말을 하니 좋게 말하지 않았겠지. 그러니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쁠 수밖에.
그래서 "알고 싶으면 부장급 이상 보내!"라 하고 끊었단다.
그 어린것들한테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자존심 상해서 말도 섞기 싫었단다.
남자들의 사회란 그런 것인가 보다.
의심하고 의심받고, 참아내고 그거 갈무리하고.
회사 직원들은 그럴 만도 한 것이 여보야 전에 있던 사람이 10억을 횡령하고 걸려서 퇴직당했단다.
그러니 그러는 게 이해는 되는데 자기까지 그렇게 취급하는 것 같아 너무 화가 났었단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도 산다. 그런데 우리 여보얀 자기가 할 말 다 하고 살아야 해서 절대 그렇게 못 산단다.
자긴 기술자로서 실력에서 꿀리지 않을 자신도 있고, 그리고 마음으로도 꿀리기 싫단다.
돈? 없이 살고 만단다. 그런 우직한 여보야가 믿음직하고 듬직했다.
그렇게 힘든데 혼자 견디고 살았으니 너무 가여웠다.
공사 막바지라 결재 해결 해줘야 돼서 그거 정산해 주느라 매일 야근하고 그래도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그래야 자기 직성에 풀렸단다. 자기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그 어린것들이 의심하고 나서니 진짜 다 뒤집어 놓고 싶었지만 그래도 참았단다.
그러니 그 속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세상 남의 돈 벌어먹기가 그렇게 어렵다며
"당신이 있어서 다 말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누구한테 이런 얘기하겠어!"
그렇게 속을 다 풀어내더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자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지 퍼 마시는 스타일이 아니라
취하는 거 정말 드문 일이긴 하지만 같이 자면서 코 골고 취한 거 보기 싫어서 어머니랑 자려고 했는데 아주버님이 끌어다 한 방에 넣어줬었다.
짐작으로 힘든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은 몰랐었는데 같이 자길 잘했다 싶었다.
처음 주말 부부로 살았던 때라 식사도 제대로 못 챙겨 먹어서 몸도 많이 축났었던가 보다.
아산 일은 원래 1년 계약이었지만 연장해서 2년 반 동안 잘 마무리하고,
이젠 부산으로 간다 했다.
부산에 작은 땅 경매받은 게 있다고 원룸을 지을 작정이란다.
좀 쉬어가도 될 만한데 쉬질 않는다.
원룸 짓고 일 년을 관리하며 지내더니, 어찌어찌 당진에서 사무실을 차리게 되었다.
또 열심히 자리매김 잘해서 여보는 벌써 와~ 10년째다.
낯선 당진에서 생활 적응하느라 힘은 들었지만 진작 지방으로 왔어야 했다며 뭐 하러 서울에서 버티고 있었는지 후회된다며 이젠 만족하며 산다.
시골 출신이어서 시골에 대한 로망 내지는 회귀본능이 가슴 저변에 있었나 보다.
작은 땅 마련하고 사무실 건물 새로 짓고 이사한 지 5개월 됐다.
이젠 또 열심히 사무실 가꾸는 일이 최애 작업이 되었다.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지만, 사무실 주위 텃밭, 화단 가꾸는 일에 아주 목을 맨다.
좁은 땅에 온갖 채소가 20가지가 넘는다며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은지 크크크 웃는다.
좋아서 웃는 건가?!
어쨌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고, 멀리 가지 않아도 건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할 수 있고,
잠시잠시 쉬는 시간에도 할 수 있는 일이어서 너무 좋단다.
퇴근하면서 이것저것 채소들을 수확해서 들고 온다.
언제나처럼 이제부터 늦가을까지 채소는 여보가 책임지겠지.
그렇게 험난한 세상을 버티며 살아내느라 속이 다 시커멓게 탔을 텐데도 텃밭 가꾸고, 식물 키우는 감성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다. 아니, 그런 감성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