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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구마구 Mar 01. 2024

뉴욕, 1월 1일 볼드랍의 열기

낭만과 미련함 그리고 객기

한국에는 보신각이 있다면, 미국에는 타임스퀘어가 있습니다. 보신각과 타임스퀘어, 무슨 관계이냐고요? 두 곳 다 멋진 1월 1일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2월 31일 밤이 되면 지상파 채널들은 보신각을 비춥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러 직접 가기도 하죠. 미국 역시도 1월 1일을 기념하는 수많은 행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행사는 뉴욕의 볼드랍입니다.


저는 사실 뉴욕 여행을 계획하기 전에는 볼드랍의 존재도 몰랐습니다. 막연히 뉴욕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 그리 큰 행사가 있을 줄은 몰랐지요.




뉴욕의 타임스퀘어 근처는 12월 마지막 주가 되면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길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아예 타임스퀘어 중심을 전부 볼드랍을 위한 행사장으로 만드는 거죠.



12월 31일이 되면 사람들은 볼드랍을 보기 위해 심하면 아침 7-8시부터 밤 12시까지 무려 16시간 정도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은 화장실을 가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흠이죠. 그래서 기저귀를 차고 오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럴 용기는 차마 없어서 당일에 물은 아예 마시지 않았고, 음식도 초코바, 과자 정도만 먹었습니다. 정말이지 배가 고파 쓰러지는 줄 알았답니다.


저는 오후 12시부터 12시간 가량을 기다렸는데요, 처음에는

“단 1분을 위해 12시간을 기다린다고?”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럼에도 '뉴욕에 왔으니 한번 해봐야지'라는 오기로 도전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볼드랍은 입장 게이트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랜덤으로 펜스가 열리고, 시간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일단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펜스 근처에 가서, 그곳이 입장 게이트라고 믿으며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아주 많았던 줄에 서서 기다리다 그곳이 아니라는 어떤 경찰의 말에 마치 좀비처럼 단체로 뛰어 다른 스팟으로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신년 행사를 왜 이리 비효율적으로 진행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스팟에서 3시간 정도 엄청난 인파에 낑겨서 기다렸습니다. 그 인파 속에서는 정말 포기하고 싶더라고요. '이렇게 기다린다고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답니다.


너무나 멋있었던 타임스퀘어

그렇게 꾸역꾸역 어찌저찌 기다리다 입장을 했을 땐 마치 무슨 시험이라도 통과한 듯 기뻤답니다. 운이 좋아 사람이 별로 없는 구역으로 입장을 했고, 여섯시간 가량 바닥에 앉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아마 열두시간 동안 서있었다면 제가 볼드랍을 이렇게 행복한 경험으로 묘사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과 뒤섞여 한 시간, 두 시간씩 보내며 볼드랍을 기다리다 보니 이 행사의 진짜 의미가 느껴졌습니다.


1분을 위한 12시간의 기다림이 아닌, 12시간 모두가 축제더라고요.


게이트 입장 전 수많은 인파에 뒤섞여 있던 것도, 물도 못 마시며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도 다시는 못 해볼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춤추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무대 위의 가수들의 공연도 물론 좋았지만, 저는 무대 아래의 사람들의 에너지가 더 좋았습니다. 다 함께 기다리며 동그랗게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그 시간 자체를 즐기더라고요. 그 에너지 덕분에 저도 더 이상 12시 만을 목 빠지게 바라보지 않았고, 그 시간에 몸을 맡겨 즐겼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새해 계획, 고민을 나누며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하지 못했던 대화도 했습니다.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시간낭비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새해 카운트다운을 위해 뉴욕에서 12시간을 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요.


낭만은 결국 미련함과 객기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비효율적인 것에 몸을 맡길 수 있는 미련함과 누군가 객기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게 할 수 있는 용기로부터요.




볼드랍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습니다. 예쁜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좋은 여행이지만, 1년의 마지막 날을 다양한 사람의 틈바구니에서 보내는 것도 돈주고도 못 사는 귀한 경험 아닐까요?


12시 정각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가루같은 종이 조각들과, 타임스퀘어를 울리는 노랫소리, 사람들의 웃음과 함성소리는 그곳에 있어보지 않고서야 절대 모를 일입니다.


결국 볼드랍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완성하는 행사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모여 즐기는 것 자체가 행사의 전부죠. 잘 즐기기 위한 장치와 새해라는 명분만 있을 뿐,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만들어내는 시간들이죠.


그렇게 저는 미련함으로 낭만을 사며 뉴욕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아니, 고생을 견딜 수 있는 용기로 낭만을 샀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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