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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안 Oct 04. 2022

to.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는 내 남편에게

아내가 쓰는 편지

OOO씨의 일 년이 어땠나요?


내일이면 복직 전 마지막 가족여행을 떠나.


여행을 다니면서 짐을 챙기면 한 가지 원칙이 생기지. 부모는 차악을 감수해도, 아이들은 차선이라도 마련해주자. 엄마 아빠는 조금 불편해도 참으면 되지만 아이들은 불편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잖아.


결혼하고서부터 당신은 늘 차악만 선택하며 살아왔던 것 같아. 지난 일 년의 휴직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캐리어에 짐이 가득 차면 제일 먼저 걷어내는 것이 내 짐이듯 말이야.


휴직을 결정하고, 계획하면서 우리는 제주 한달살이 유럽여행, 날마다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나 마시고 책 읽다 잠이 드는 무용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아내가 벌어오는 작은 월급과 휴직수당은 아이 둘 기르며 예상 못한 변수에 생계 걱정을 문득 하게 했고, 우린 예상과 달리 제주 한달살이나 유럽여행같은 것은 끝내 가지 못했어.


복직을  달여 앞두고서야 날씨가 좋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사나흘씩 외지에서 숙식을 했지만, 비단 날씨가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지. 가을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우리에게 이런 여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우리  사람 모두 알고 었어. 아무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내색하지 았지만.


고생 많았어. 그리고 앞으로 다시 기약 없는 고생을 부탁해야 하네. 나는 당신이 휴직을 하며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간은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젖먹이 둘째는 갑작스레 엄마와 떨어져 어린이집을 갔고, 첫째는 유치원 적응, 나도 담임 업무에 낯선 일들로 두려웠으니까. 당신의 쉼을 위한 휴직이 우리 세 모녀의 대가 지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어.


아빠가 휴직한다니 주변에서는 모두들 좋은 기회라며 환영했어. 엄마는 육아로부터 조금 벗어나고, 아빠도 애 키우는 거보다 일하는 게 낫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마치 엄마 육아 연합에서 추진하는 아빠 고통분담 행사같은 계몽 의지(?)로 가득한 표정이었지.


내가 출근하면 아이 둘을 보내고, 바지런히 집안일을 하고, 몇 시간씩 산을 오르러 다니고, 200시간 되는 수업 들으며 자격증 따고, 명사 강의 쫒아다니고.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일 년이 지났어.  육아가 고되다는 것은 끝내 깨닫지 못한 채 말이야. 그 어떤 어려움도, 직장에서 당신이 가진 스트레스보단 적다는 것만 더욱 확신하고 돌아가네.


당신 복직 전에 내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가장 친한 친구가 먼 곳으로 떠나는 마음이야. 아이들이랑 저녁시간에 전쟁을 치를 때 함께 할 전우를 잃어 막막한 기분이고. 생계를 위해 생명을 닳게 일할 당신이 안쓰럽고 측은해서 울컥 눈물이 나.


일 년을 보내고 나니 몇 가지는 알 것 같아. 겪어보기 전에 세우는 아름다운 계획은 절대 실현되지 않아. 아이들도 아프지 않고, 경조사도 없고, 날씨도 좋은 그 모든 행운이 겹치는 날은 없어. 오늘 당장 떠나야 새롭고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그리고  당신 휴직은 우리 가족의 대가 지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십 년 직장생활에 묵묵하게 쌓아 온, 원래부터 당신 몫이었어.


내가 당신에게 벌어다 준 시간이 고작 일 년이라 미안해.  밤마다 목덜미를 끌어안고 통통한 볼을 갖다 대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당신 책임 이상의 일은 하지 말자. 그리고 건강하자.


아무 계획도 이루지 못했지만,  아이들 보내고 내 가장 편한 차림과 얼굴로 같이 걷고 커피 마시고 산책하는 소박한 일상이 좋았어. 애들 아플 때 애들 등원 안 시키고 넉넉하게 데리고 있을 수 있어서 좋았고. 문득 점심 먹으러 시외로 나가는 하루하루가 여행 같아서 좋았어. 고마워.


짧은 휴식기가 당신도 힘들 때 돌아보는 추억으로 남았길 바라며. 출근 잘해. 세 모녀 집에서 각개전투 끝내고 기다리고 있을게.



2022.9.30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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