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신부님에게 디지게(?) 혼난 썰
“선생님 (수행평가지에 시간 외 작성이라고 쓴)이 빨간 글씨 무슨 뜻이죠? 저 감점인가요?”
“너 선생님한테 제일 궁금한 게 점수구나. 궁금하면 따라와 교무실로!”
되도록 아이들을 혼낼 때 감정을 담지 않으려 노력한다. 감정을 흠뻑 실어 아이를 훈계하면 목소리에 힘은 강하게 들어갈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교육이 아니라 화풀이었다는 후회가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참기가 힘들었다. 목소리가 격앙되고 들떠있던 아이들 분위기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믿었던 학생이었다. 반장이었고, 성실했고, 교과를 잘하고자 하는 욕심도 있어 교사인 내가 ‘OO아 좀 쉬면서 공부해, 이럴 땐 쉬는 거야.’라고 자주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아이가, 수행 평가지를 걷어 내 뒤를 따라오며 자신의 평가지에 손을 댔다. 반 전체 아이들이 작성한 내용을 훑어보다 분량을 더 채우고 싶은 욕심이 들었던 것이다. 1차시 평가시간은 충분히 주어졌고, 3차시 동안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학년 전체에 공지도 되었다. 어차피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평가지였지만, 정해진 시간 외에 평가지를 수정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올라와서 처음 겪는 수행평가이니 모를 수 있다 생각하여 훈계하지는 않고 한 번 더 기회를 줬다. “OO아, 지금 뭐 하는 건지 설명해줄래?” “아 아녜요.” 하고 황급히 자기 평가지를 내고 가버렸다. 황당했다. 아니 황망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데, 평가의 중요성이나 규칙은 모를 수 있지만, 잘못을 했을 때 대처하는 법은 모를 수 없는 나이었다.
고민을 하다 아이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시간 외 작성'이라고 붉은색 펜으로 첨삭한 평가지를 나눠주며 OO이가 무언가 느끼길 바랐다. '평가의 공정성' '부정행위' 그런 무서운 말들을 떠나서, 아이가 반성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기를 기대했다. 그런 아이의 첫마디가 고작 점수였던 것이다.
나를 따라 교무실로 오는 아이를 등지고 목소리를 낮추기 위한 준비를 했다. ‘어떤 말을 해줄까. 교과 외에 인성교육한답시고 아이랑 적대적 관계가 되지 않으면서,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날따라 교실에서 교무실로 걸어오는 오는 복도가 참 길게 느껴졌다.
“OO아, 선생님이 어른이 되어서 신부님한테 디지게(?) 혼난 적이 있어.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OO이 너 종교 있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선생님은 성당 다녀. 너 종교 없어도 예수님과 유다 알지? 그럼 선생님 말 무슨 말인지 이해될 거야 잘 들어봐.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유다라는 사람이 있어. 유다는 성경에도 부정적인 사람으로 기록되는데,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어느 날 들더라? 무죄한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나서 유다는 후회를 해. 위증한 대가로 얻은 은을 도로 돌려주면서 무고죄를 범하였다고 제사장들에게 자기 죄를 고백해. 그런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지. 그 장면을 읽으면서 선생님이 신부님한테 질문을 했어.”
‘신부님, 저는 유다가 왜 이러는지 이해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왜 유다보다 베드로를 예뻐하시는 거죠?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마찬가지였잖아요. 유다가 왜 죽었는지,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미안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잖아요.’
그렇게 질문을 했는데, 순간 신부님의 얼굴이 벌겋게 닳아 올랐어. 선생님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고 친구처럼 가까운 신부님이었는데, 난 그런 모습을 처음 봤지. 대답을 듣기 전에도 ‘아, 내가 무언가 크게 잘못된 질문을 했구나.’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어.
그리고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선생님이 예수님이라 생각해보세요! 잘못을 10번 하고도 10번 다 내 앞에 와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학생과,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미안해서 말도 안 하고 나를 찾지 않는 제자, 그 둘 중에 누가 더 예쁜 가를요.’
"학생이라 생각하니 즉시 납득은 됐지만,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렸어."
“OO아, 사과에는 용기가 필요해. 그런데 우리가 사과를 할 때 무엇 때문에 용기를 내는지 아니? 상대방과 나의 관계가 소중하기 때문이야. 베드로는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미안하지만, 정말 죽을 만큼 미안하지만,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죽음에 가까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서를 구한 거야. 유다는 심지어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신의 목숨을 해하면서 용서를 구할 기회를 버린 것이고. 선생님이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해봤는데, OO이 너랑 내 사이가 이것밖에 안되나, 고작 점수를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 행정적으로 엮인 이 관계만이 전부인가 이런 생각들이 들어 선생님은 너무 화가 났단다.
아이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이 없었다.
“OO아, 너를 보면 선생님 어릴 때 모습이 생각나. 사랑받고 싶은 선생님이나 더욱 친해지고 싶은데 단짝이 되지 못하는 친구를 보면서, ‘내 진심도 그에 못지않은데 왜 그런 걸 몰라주나’ 억울하던 그런 모습 말이야. 선생님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무릅쓰고 ‘고맙다’ ‘미안하다’ 말할 용기가 없었던 거야.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을 잃으면서 그걸 알았지만, 너는 더 일찍 알았으면 좋겠구나.”
“점수는 어떻게 할지 선생님이 규정을 찾아보며 조금 더 고민해보마. 그런데 그 이전에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잘못을 고쳐야 하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너에게 주는 벌은 이 원고지야. 반성문 써서 내일까지 가져다줄 수 있겠니?”
아이는 다음날 반성문을 약속한 시간까지 가져왔다. 반성문을 태어나서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 인터넷에서 어떻게 쓰는지 찾아보고 썼다는 귀여운 투정을 부린 후에, 얼마나 절절하게 부끄러운지를 고백하는 글이었다. 투박하게 써 내려간 진심에 미처 풀지 못한 앙금마저 녹는 기분이었다.
교사가 되길, 못난 청소년기를 보내보길, 참 잘했다 느끼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