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제 교사의 교단 일기
나는 통제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없다. 아이들이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건 출입문이 아닌 곳으로 출입을 했건 간에, 지각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된다는 생각, 학교에서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은 복장이면 괜찮다는 주의라 소위 생활지도라는 것이 잘 되지 않는 교사이다. 그리고 정말 그런 것들이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출입문이 아닌 창문을 넘어 테라스를 이용하니,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전달이 있었다.
“부장님, 그럼 출입문을 개방해주면 안 되나요? 문이 잠겨있으니 아이들이 창문을 넘어 다니는 것 같아요.”
“출입문을 개방해주면 사각지대에서 어떤 일을 할지 몰라서,”
“그러기엔 이 장소가, 햇살이 너무 아깝네요. 네 알겠습니다. 창문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지도하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제도적이지 못한 사람이라, 각종 불합리한 규칙과 제도에 대해서도, (물론 개인적인 기준이다.) ‘왜’라는 의문을 늘 항상 달고 산다.
담임에게 3월은 한 달이 일 년 같은데, 그 일 년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간 느낌이다. 기시감이 든다. 둘째를 낳았을 때의 시간 감각과 같았다. 아이를 낳았는데, 정신없이 힘들었는데, 한 숨 돌릴까 생각해보니 돌이 지나있었던 경험.
3월에 감추었던 아이들의 전투력이 벚꽃과 함께 찾아왔다. 학년의 첫 학교폭력심의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학생부에 근무해보면서, ‘소년재판’이라는 화제의 드라마를 보면서 내 아이가 학교폭력 문제의 피해자가 된다면, 반드시 학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 ‘행정부와 사법부, 국가 권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라는 다짐을 숱하게 했다.
학생이라고 이해하기에는 범죄 수준이 성인에 못지않았고, 계획적이었고 치밀했으며, 죗값에 응당한 처벌이라고 하기에는 처분이 약했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학생부의 교사로서, 피해자나 엉뚱하게 가해자가 된 부모님을 뵈면 ‘어머니 차라리 경찰에 수사를 맡기고 소송을 하세요.’라는 말이 차오를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반항심 가득한 내 생각은 ‘학교는 왜 덮으려고 하는 것인가?’였다.
직장에서 권태감이 3년이면 찾아온다 했었던가. 감성적이다 못해 감정적이던 초임기를 지나 이곳저곳 학교를 겪어보며 표준의 안목이 갖춰지면서 교사는 권태감이 시작되는 것 같다. 학교에 대한 불만도 구체적이게 되고, 아이들이라고 순수한 줄 착각했던 기대치에 뒤통수를 호되게 맞게 되면 '절차대로, 감정을 빼고, 규정대로' 라는 방어적 철옹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회의를 했다. 이번에는 교권침해 사안이다. 교사의 지시 불이행에 대한 처분이 이뤄질 예정이다. 수업 시간마다 다른 교재를 펼쳐놓고, 수업에 참여하기를 지시하는 교사와 몇 번의 갈등이 있던 학생이다.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선생님의 오해가 있었고, 오해로 인한 지도를 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선생님의 표현이 아이의 기준을 넘긴 것이다.
사실 그 학생은 학년의 눈엣가시였다.
본인은 정시파이니 뭐니 공공연하게 선포하면서 교과시간마다 수업하시는 선생님들을 대놓고 무시했다. 인터넷 강의를 틀어놓고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고 귀마개를 하고 문제집을 푸는 일은 허다했다. 교과시간에 교사가 교재라도 꺼내보라고 채근하면,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싹퉁머리(?) 없는 학생이었다.
학교폭력이니 뭐니 날고 긴다는 학년의 문제아들에 버금가는 벌점 처분이 내려졌다. 소선도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교과시간에 벼르고 있던 선생님들은 모두 한편이 되어 입을 모았다. 언제 한 번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며 이번 기회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지나치게 강한 아이들은 사실 마음이 불안한 경우가 많다. 해당 학생의 담임 선생님께서 관찰한 그 아이는 위태위태했다. 집에서도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고, 여차하면 학교를 중도 이탈해서 자퇴까지 할지도 모른다는 그림이 그려졌나보다.
담임 선생님이 청소를 시키고 반성문을 받고 상점을 주었다. 소선도위원회가 열릴 예정인 학년은 발칵 뒤집혔다. 학년 부장님이 그 반 담임 선생님을 불러 ‘학교에 엄연한 절차와 규정이 있는데’를 근거로 언성을 높이셨다. 담임 선생님은 벌점은 학년이나 교과의 권한일지 모르나, 상점은 내 권한이라며 물러설 여지가 없어 보였다.
‘브라보.’
나는 오늘 ‘학교는 왜 덮을 일도 들추려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 품어보았다. 그리고 그 의문이 상쾌하게 깨지는 것을 목도했다.
학교는 처벌을 위해 아이들을 모아놓은 교도소는 아니니까요. 교육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이 학교의 존재 이유가 맞다면, 오늘 선생님의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학교폭력 가해 학생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맥락 없이 처분의 수위만 놓고 학폭위의 무용론을 외쳤던, 수많은 저의 밤을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