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를 꽂아 다람질을 했다
점심시간었다. 오전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왔다. 점심을 먹고 오후 학교로 수업을 가야한다 현관 문을 여니 팬티 바람으로 남편은 다림질을 하고 있다. 딸 셔츠와 남편 셔츠이다. 남편이 은행 다닐 때는 내가 아침마다 셔츠를 다려 주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퇴직하고 내가 학교 근무를 하는 동안 다림질을 하는 일은 남편 담당이 되었다. 물론 빨래도 해 준다. 구김살이 간 바지나 셔츠, 손수건 등을 다려준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이상하지 않다.
30도가 넘는 이 더위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땀을 흘리면서 딸 셔츠를 다리는 모습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이 시대에 저렇게 집에서 다림질하는 것은 드문 모습일 것이다.
어릴 적, 내 어릴 적은 60년대다. 전기불도 없는 때 태어나 어린이 시절에 첫 전기가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하던 밧데리사의 밧데리를 가져와서 온 동네에 불을 밝혀 주었다. 밧데리는 10키로 사과상자보다 크고 검었다. 우주 영화에 나오는 감은 우주선의 외부 벽의 한 단면을 잘라 만든 듯한 문양의 상자에서 전기가 나왔다. 추석이 다가오는 요즘은 고향에서 휘영청 밝은 밧데리 불을 켜고 밤에 전을 구우면서 동네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떠들던 모습이 입가에 함박 웃음을 웃게 한다. 어머니가 다린 옷은 아버지 출근복이 아니라 어른들과 막내 고모의 교복이었다. 집에서 베틀에 직접 짠 광목이나 무명으로 치마를 해 입으셨던 당시에는 다림질을 해서 입었다. 벌써 60년이 지났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몇 장 있다. 할머니가 물레로 실을 잣던 모습과 마루에서 넓은 치마를 펴놓고 다림질을 하던 모습이다. 무릎에다 실을 비벼가며 물레를 돌리면 어느새 무명 실타레가 완성되었다. 할머니가 일하시는 옆에서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실타레가 뭉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그 옆에서 베틀로 실을 짜셨다. 인두와
화로의 숯을 담아 넓은 치마나 어른 한 복 바지를 다리시던 모습이 남아있다. 우리 집에는 숯을 담아 불씨를 간직하던 청동화로가 있었다. 너무나 눈에 선하다. 세 발이 달리고 누런 빛의 화로였다. 그 화로에 인두를 꽂아놓고 어머니는 조금 더 좁고 세심하게 다려야 할 부분에는 인두를 사용하셨다. 저고리 동전 밑이나 겨드랑이 부분과 앞 섶의 곡선 부분은 인두가 필요했다. 넓은 치마를 다릴 때 당시에는 분무기가 없어 사람의 입으로 물을 뿌렸다. 어머니가 물을 뿌리는 모습이 예술이었다. 볼이 가득하도록 입에 물을 머금고는 마치 아침 하늘에 퍼지는 햇살같이 어머니 입술에서 분해된 물살이 안개처럼 치마위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나도 몇 번 시도해 보았으나 물살 밑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등 부실한 모습에 그만 두었다.
일년 전에까지 시어머니 재봉틀을 가지고 있다가 딸이 굳이 정리하자고 해서 바느질 잘 하는 친구집에 주었더니 서울 사는 사돈까지 와서 그 재봉틀을 이용한다고 했다.
지금은 다림질 도구였던 다듬이돌을 가지고 있다. 한 십여전 전까지 이불 호충을 직접 이어 사용하였다. 벗기고 씻고 풀하고 다리고 꿰매는 일이 보통일은 아니었지만 하던 일이라 오랫동안 손으로 꿰매 입혔다. 다듬이돌에 장단을 맞춰 두드리면 올이 바르게 서고 천이 발라지는 효과가 있다. 이불 껍데기를 입히는 일은 일 년에 한 번은 해야 해서 장담는 일, 고추장 담는 일, 김장하는 일과 함께 중요하고 큰일이었다. 그야말로 집안 일의 4대 천왕이었다. 대가족이었고 일도 다함께 했다. 가족들이 함게 움직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족 분 아니라 온 동네가 거의 혈연 관계도 아니더라도 당시는 농사부터 제사 음식 만들기까지 함께 움직였다. 아이도 잘 때만 엄마 품 안에서 잤지 온 동네 아이였다. 지금은 핵가족에 따른 문제를 보면 가난했던 그 시절에 서로 돕고 보듬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어린 시절 사용하던 청동화로가 사라지고 인두도 사라지고 숯불을 담아 다림질 하던 도구도 다 사라졌다. 제사 때마다 기와를 잘 게 부수어 가마니 위에서 짚으로 닦던 놋그릇도 사라지고 뒤안(뒤꼍)도 사라지고 어머니도 일찍 가셨다.
그러나 저 북천에서 떠난 기차가 초량마을 모랭이를 돌아올 때 기적을 울려주면 역을 향해 달렸고 진주로 통학하던 동네 고등학생들이 가방을 옆에 끼고 달음박질을 치던 아침 모습은 내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모두가 달리기 선수였다. 고모는 1km는 족히 넘는 거리를 어머니가 다려준 교복 치마를 휘날리며 달리고 남학생들은 모자를 꽉 지고 달렸다. 지금 봐도 집에서 꽤 거리가 있다. 내 꿈에도 자주 등장하는 역 가는 길이 고모가 달려가는 모습과 함께 다양한 그림으로 나온다.
“뿌웅” 기적 소리가 들리면 고모는 달리기 시작했다. 겨울날이면 채 마르지 않은 양말을 신기도 했다. 요 밑에 말리다 덜 마르면 ㅁ아침밥을 하는 무쇠솥에 올려 더 말렸지만 다 말리지 못할 떄도 있었다. 겨울 바지는 온돌방 요 아래 넣어 각을 잡으셨다. 똑바로 주름을 잡고 흩으지지 않게 요 밑에 넣었다. 밤새 뜨끈한 요 아래서 바지가 익었다. 추운 겨울 아침 요 밑에서 나온 따끈한 바지를 입을 때 고모는 참 기분이 좋았을 것 같다. 고모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시집을 왔으니 어머니가 키운 것과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아무 것도 안하던 분이셨다. 밥도 안 하고 간식도 못 만들고 반찬도 맛이 없었다. 어머니가 계시면은 그나마도 안 하셨다. 고모들은 어머니를 평생 친 어머니처럼 따랐다. “세이야”하면서 심한 진주 사투리로 부르면서 다들 늙도록 어머니와 친했다.
아무리 집안 일이 바빠도 다섯 시누중 막내 시누이인 막내 고모에게 다람질한 교복을 입혀 보냈다. 고모도 언니들보다 5살 아래인 조카가 더 가깝다고 한다. 둘 다 진주로 시집와서 도시 시어머니의 매운 시집살이도 비슷하다. 시골 출신이고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 우리는 말로 표현하는 게 느렸다. 잘 표현하지 않았다. 표현하면 점잖지 못하다고 아버지께 교육을 받았다. 크게 웃지도 말고 성내지도 말고 항상 온화한 얼굴로 지내야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표현 안하는 미련해 보이는 며느리가 시어머니 입장에서 답답했을 수도 있다. 나는 며느리 보면 나같은 미련 곰탱이 말고 여시같이 똑똑한 며느리를 보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지혜롭고 똑똑한 그리고 이쁜 며느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옛날 우리 어머니와 고모들이 잘 지냈던 것처럼 며느리와 집안 일을 상부상조하면서 잘 지낸다. 며느리와 둘이서 베트남 여행도 4박 6일 다녀오고 집안을 꼼꼼하게 돌봐 준다. 이건 고모들과 화로에 인두를 꽂고 하하호호 이야기 꽃 피우며 양 쪽에서 치마를 잡고 늘이며 다림질하던 마음을 주고받던 것보다 부족하진 않다.
올해처럼 무더운 날씨에 막내딸 셔츠를 다리는 남편을 보니 무쇠 솥에 보리밥 해서 퍼내던 어머니, 인두를 하늘로 올렸다 내리며 열을 식혀 저고리 동전 밑을 다림질 하던 어머니 모습이 겹치는 것 같다.
목화씨에서 실을 뽑던 물레 다림질 도구 인두
*사진은 http://cafe.daum.24forgetmnot에서 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