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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가 Sep 08. 2024

그날의 아픈 기억! 성교육에 진심인 나를 만들다.

지울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학부모 성교육을 마치고 섬주섬 정리를 하는데 한 어머니가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신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얼마 전 유치원에서 있었던 사건을 꺼내셨다. 또래가 딸아이의 소중이를 졌다고...


멘붕이 올 것 같은 표정의 어머니는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겠냐고 , 아이를 잘 내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결국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




아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 물어보 "이제 그 일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놀고, 잘 자고 , 잘 . 하지만 보이지 않는 충격이 훗날큰 상처로 남을까 봐 걱정다" 말씀셨다.


나는 책하는 머니에게 위로 건넸다.


"일단 아이가 믿을만한 어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알린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어머니! 아이 잘 키우셨어요. "


경험자로서 말씀드리자면, 아이가 먼저 그 일을 꺼내면 힘든 감정을 잘 받아주시되  일부러  그 일을  꺼내실 건 없고요.


지금처럼 미주알고주알 일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수 있도록 지지하시며  지내시면 될 것 같아요.




이런 순간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린 날의  떠른다. 그리고 아이가  에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의식적으로 다는 생각을 한다.



아픔을 말할 수 없다는 것

내 아픔을 공감해 주고

 내밀어 주는 사람이 없 외로움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안 보이는 막막함


가끔씩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아홉 살의 어린아이 

나를 찾아온다.


토닥토닥...



나는 6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먹고살기에 바빴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당시 국민학교라 불리는 초등학교를  입학한 첫날 이후 먹고살기에 바빴던 엄마는  번도 학교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찾아오지 못했다.


누구는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매일 학교를 드나들었지만 그 는 나랑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학교가 즐거웠고 들판의 잡초처럼 씩씩하게 잘 지냈다.



화장실이 재래식이었던 당시 학교는 화장실이 교실 건물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만큼  아이들이 많았지만 화장실 수는 부해서 쉬는 시간 10분  일을 해결하기에 너무 짧았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 문 앞은 제나 긴 줄이 이어졌다.


수업 중 소변이 너무 마려웠는데 하필 선생님그 시간 수업을 늦게 끝내셨다. 허겁지겁 달려간 화장실 문 앞에는 역시 줄이 나있었고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수업 시작 종이 요란하게 렸다.


길게 줄을 섰던 아이들은 종소리를 듣자마자 선생님께 혼날까 봐 일제히 교실로 뛰어갔다.


거짓말처럼  그 많던 아이들이 사라졌다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커다란 화장실 건물 안 적막감마저 감돌 무서움증이 일었지만 교실로 돌아가기  나는 소변이 너무 급했다.



급한일을 해결하고 화장실 을 열고 나  내 앞에는 낯선  아저씨가 서 있었다

(당시는 아저씨라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십 대 후반으로 생각된다.)


다짜고짜 아저씨는 를 껴안았다. 


듣는 아저씨들 기분 나쁠 테니 이제부터 그 놈이라 쓰겠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그놈은 멀쩡한 대낮에 학교에서 더 이상 진도를 나가 것이 불안했는  갑자기 하던 짓을 멈추 내게 말했다.


"학교 끝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릴 거다.

이따가 다시 보자."



교실로 돌아온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체 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잠깐의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지 내 머릿속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놈이 나를 풀어주남긴 말 가에 계속 맴돌았다.

앞으로 뭔 더 나쁜, 더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감...


이후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도  난다.




마침내 수업이 끝났다.


어쩌지? 정문 앞에는 그놈이 내가 나오기만 기다고 있을 텐데...

나는 두려움에 떨며 멀리서 정문을 바라보았다.


정문 앞은 온통 집에 돌아가아이들의

작고 까만 머바글바글 했다.


순간 번개처럼  줄기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 저 아이들 속으로 숨어들어야겠다.


저 아이들이 집에 다 가고 나면 화장실에처럼 나는 또 혼자 남겨지고 말 거야. 


나는 주저 없이 아이들 무리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놈이  정문 근처 어딘가에 숨어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다가 목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아서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쳤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돌아보고 또 돌아

두려 온몸을 떨었다. 학교를 오가며 놈을 마주칠까 봐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그 두려움으로부터 멀어졌다.


 어린 내가 누구의 도도 없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혼자 지켜낸 것이다.


그날 나는 혼자였다.

눈물 나게 안쓰러운 아홉 살의 어 날..




몸에 새겨진 기억


이후 그날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로 남았다. 쩐지 엄마에게도 말하면 안  것 같다.


그러나 은 두고두고 나를 따라다녔다.


한동안 잊힌 것 같았던 그 기억은 사춘기 무렵이 되자 어느 순간 불쑥 다시 나를 찾.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놈의 물컹한 혀가 일방적으로 내 입술을 밀고 들어오던 러운 느낌, 작은 내 몸을 았던 그놈커다랗고 두툼한 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느낌세월이 흘러 남편과 연애를 하고. 결혼 후 남편과  스킨십을 나눌 때 갑자기 스토커처럼 나타났다. 나는 그럴 때마다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든 기억을 떨쳐내려 음속으로 거세게 도리질을 치곤 했다.


그놈은 알까?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홉 살 어린이의 기억 속에 처럼 살아남아 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출몰다니는 것을...


이  쓰레기 같은  나쁜 00

과학이 발달해서

이 더러운 기분을   뇌에 이식해 주는 세상이 으면 좋겠다.




가끔 그날을 생각다.

당시 일을 겪자마자  선생께 그 사실을 알렸더라면?

집에 와서 엄마에게 내가 은 일을 알렸더라면?


그러나 당시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못했다.


두고두고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피해 사실 보다도  시 느꼈던 외로움이었.

그 놀람과 두려움의 순간에 혼자라는 픔이었다.




몇 달 전  우연히 구십이 까워진 친정 엄마와 상처에 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날의 일을 처음 꺼내 놓았다. 엄마는 놀라시며 왜 그 당시 내게 말을 안 했냐고 하셨다.


성폭력이라는 개념이나 용어조차 없었던

시절었다.


그 시절 어른들은 리에게 단  번도 '힘든 일이 생기면 믿을만한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라'  단순하고 교과서적이기까지 한 말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들려준 적이 없.


 주변에는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어른들이 거의 없었다. , 본 적이 없다.




교대를 가려던 나는

어쩌다 간호학을 전공하고

어쩌다 보건 교사가 되

 다른 생님들보다

아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


나는 황이 허락하는 한 성교육에 진심을 기울였. 그러다 보면 나처럼 막막한 처지의 아이들 손을 내밀곤 했다.


단언하건대 성교육을 통해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은 나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나는 스스로 치유되었다


나를 성교육 강사 만든 7할은 그날의 아 기억이고, 3할은 현장에서 마주친 아이들의 아픔이다.



아무리 기를 써도 나는 온전하 피해 입지 않은,  전의 상큼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가 단단해지자

그 일  떠올라도 전처럼 힘들지 않다. 

담담한 마음으로 상처를 바라볼 수 있다.

즐겁게 일상을 잘 살 있다.


이 땅의 많은 피해자들이

나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그들이 단단해질 수 있도록

사람들이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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