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마음의 거리가 있다
나를 만나본 사람들은 믿기 어려워하지만, 나는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하루 종일 말을 거의 안 했고 수업이 재미없는 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노트 뒷장에 순정 만화 주인공을 그리며 나만의 세계에서 혼자 놀았다.
다행히 반에는 그런 내게 다가오는 아이들이 꼭 한 두 명씩 있어서 학교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교사가 되자 전체 교직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아야 할 진땀 나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심지어 초임 발령을 받은 학교에서는 해당 교과 선생님이 부족하다며 이 초짜 보건 교사에게 가정 수업까지 떠 안겼다. 나는 졸지에 아이들 앞에서 작은 목소리를 크게 짜내며 수업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수줍음은 점차 나와 먼 이야기가 되었고 심지어 연차가 10여 년을 넘어가자 외부 강의까지 나가기에 이른다.
외부 강의를 처음 앞두고 떨었던 기억은 20년 도 넘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강의안을 짜고 인사말부터 시작해 ppt 한 장 한 장마다 설명할 내용들과 사례, 농담까지 치밀하게 적으며 시나리오를 다음고 또 다듬었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안방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실성한 여자처럼 혼잣말로 연습을 수십 번 거듭하며 리허설을 반복했다.
그렇게 200%를 연습하고 간 첫 강의는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강단에 서는 일이 많아졌고 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겁내지 않는 간 큰 강사로 성장했다.
내 강의 인생에서 가장 떨렸던 강의는 첫 강의가 아니라 오히려 초짜 티를 벗고 '강의 좀 한다'라고 소문났던 때다.
15년 전쯤 서울의 모 중학교에서 60명 정도를 대상으로 한 강의였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마이크를 잡은 내 손이 움직이는 게 다른 사람 눈에 보일정도였다.
"나름 강의 준비도 철저히 했는데 대체 나 왜 이러는 걸까? 500명이 넘어가는 사람들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강의를 했던 난데?"
결국 한 시간을 예상하고 준비한 강의는 30분 만에 끝났다.
이런 민망함이라니!
한마디로 그날 강의는 개 망했다.
가끔씩 기억의 서랍에서 '그날 나는 왜 이유 없이 떨었을까?'를 생각해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자료 검색을 하다가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영리한 내 몸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사람은 일정한 공간을 필요로 하고, 다른 사람이 그 안에 들어오면 긴장과 위협을 느낀다는 ' 인간관계의 거리이론'을 접하기도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Zone): 45cm 이내
매우 친한 사이. 사적인 고민을 털어놓는 가족, 친구, 이웃, 친지 등 친밀도가 높은 관계의 거리인 동시에 맞붙어 싸우는 거리이기도 하다.
연인, 부부, 엄마와 아기처럼 친밀도가 놓은 경우 안면부 10cm 이내도 허용한다.
■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Zone): 45cm~1.2m
팔을 뻗었을 때 닿는 거리 정도로 잘 아는 사람. 학급 친구, 동료 등 잘 아는 사람끼리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이다.
■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Zone): 1.2m~ 3.6m
서로 양팔을 벌려 손 끝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로 배달부, 집 수리공, 낯선 사람 등 간의 사무적인 거리이다.
■ 공적인 거리( Public Distance Zone): 3.6m~9m
무대와 관객, 강의, 연설 등이 진행되는 거리이다.
동시에 위협을 받을 경우 피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날 강의장은 유난히도 좁았다.
작은 교실 하나에 60명쯤 되는 교사들이 들어와야 하니, 강의를 하기 위해 서 있는 나와 강의를 듣기 위해 앉은 교사들의 책상은 '거의 붙었다'라고 할 만큼 지나치게 가까웠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다시피 한 상태로 강의를 하려니 마음이 심하게 불편했고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나의 뇌는 그 상태를 위협으로 느꼈고 마침내 마이크를 잡은 내 손은 덜덜 떨기에 이르렀다.
'빨리 이 위험한 장소를 벗어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본능이 발동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빠르다는 지적을 자주 듣는 내 말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불안감으로 전두엽이 마비된 나는 준비했던 사례나 마음이 느긋할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농담 따위를 던질 수 없었다.
결국 강의는 예정보다 빨리 끝나버렸고 해마다 같은 주제의 연수를 들어야 하는 고역을 치르기 싫어 뒤늦게 느릿느릿 연수장을 찾은 교사들은 강의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반가움을 안고 돌아갔다.
공적 만남이었던 그날, 우리들 사이에는 최소 3.6m 이상 떨어진 거리 두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강의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적절한 인간관계의 거리를 침범당한 나는 긴장과 위협을 느끼다 못해 멘붕이 온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날 강의를 망친 범인은 강의장이었다고...ㅋㅋㅋ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솔직하게 말한다.
"저 지금 떨려요. 지금 우리 사이 너무 가까운 걸까요? 저 좀 멀리 떨어져 있을게요."
그러나 고맙게도 대부분의 강의장은 내게 심한 친절을 베푼다. 강의를 들으러 온 분들이 대개 맨 뒷 좌석부터 차곡차곡 앉으시기 때문이다.
주관자가 제발 앞자리 좀 채워달라고 부탁해도 그분들은 본능적으로 생면부지의 나와 충분한 거리를 두고 앉으신다. 3.6m면 충분한데도 멀리 더~ 멀리 9m 이상!
이 분들의 마음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그분들과 나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