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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Jan 26. 2023

'딸' 보다 나은 '며느리'

[보글보글 매거진] 글놀이 '며느리, 사위, 사돈'

이 주제를 받고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이번 주는 [보글보글 매거진]에 글을 쓰는 것을 포기했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쓰면 왠지 안될 것 같았죠.

며느리, 사위, 사돈이라는 존재가 남이면서도, 가족이거나 가족 같은 존재이기에

조심스러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각자의 역할에 대한 제 생각을 써볼까도 했는데,

이 글을 아내와 자식들과 며느리도 읽을 것이기에

왠지 '잘해라'라고 강요하는 듯해서 못 쓰겠더라고요.


역할에 대해서는 늘봄유정님께서 너무 잘 써주셔서(강요하는 느낌이 없이) 안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배님의 글을 읽고, 저도 용기를 내어 써봅니다.


아래의 글은 '늙어가면서 아내에게 밥을 잘 얻어먹거나 어떻게든지 살아남기 위해' 아부하는 것이 아닌

100퍼센트 진실임을 밝힙니다.


이 글을 읽을 누나와 여동생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합니다.(제목부터 '딸'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기에)


우리 가정사를 공개된 곳에 쓰는 것을 반대하는 아내의 뜻을 거슬렀으니 몇 날 며칠을 굶겨도 할 말이 없으나, 아내의 이해를 바랍니다.



아래의 나이는 아내의 나이입니다.


@ 20~25살 2월 3일 : 여자 친구인 상태로 남자 친구 집에 자주 들락거리다.

사귀기로 하자마자 집으로 데려갔다. 끝까지 가기로 하고 사귀었으니까.

작은 가게에(전세) 아주 작은 방과, 부엌이라 할 수 없는 그냥 한쪽 구석에 아궁이와 수도와 하수구가 있는 아주 보잘것없는 곳이었다.

집에 간 첫날. 20살 밖에 되지 않은 아내는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빨래를 보고 그걸 빨았다.(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정교육의 힘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장모님을 뵙고서 알았다.)

나는 너무 미안해서 냉장고에서 야쿠르트 한 병을 빼서 줬다.

엄마는, 자기에게는 해주지도 않는 것을 여친에게 해줬다고(사실이 아니다. 엄마에게는 더 많이 해주고 있었다. 전형적인 시어머니의 모습) 불만을 가지셨고,

여친을 집에 데려다주고 온 제게 여친의 외모를 트집 잡으셨다. 잘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 없으셨고.

'두꺼비도 자기 자식은 예쁘다고 한다'라는 것에 힘입어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여친을 집에 데려갔다.

첫날 흠잡으신 것 빼고는 엄마는 더 이상 여친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지 않으셨다.


@ 25살 2월 4일 : 시집을 오다.

아이를 빨리 낳아서 빨리 키워야 한다는 저의 똥고집(사춘기 때부터 가진 철칙. 아버지 40살에 내가 태어났는데 집도 가난하고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 삶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빨리 낳아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에 의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였지만(나는 학생, 아내는 교사 1년 차)

양가의 부모님을 일주일 동안 설득하고, 아직은 어린 여자 친구를 구워삶아서 결혼을 하였다.

결혼만 하고, 나는 내 집에 아내는 처가에(본가와 처가는 차로 두 시간 거리) 그대로 살았다.


@ 26살 5월 6일 : 드디어 첫 아이가 태어나다.

아들이었다.

엄마는 1남 3녀를 낳으셨고, 당시에는 남아 선호사상이 강했었기에

내 부모님은 아들을 낳아주기를 학수고대했었으니,

양가는 살면서 느껴 본 것 중 가장 기쁘다 할 정도로 난리가 났었다.


@ 27살 ~ 33살 :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 셋을 키우며 교사를 하다.

본가는 장사를 할수록 빚이 늘어서, 결국은 내가 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안될 것 같아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장사를 접게 하고, 금융권의 빚은 가게 전세금과 물건 정리한 것으로 겨우 갚고

사채는 사채업자들을 한 곳에 불러서 꼭 갚겠다는 각서를 써주었다.

내 부모는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여수로 내려갔고,

전셋집을 얻어 아내와 손자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아내는 여수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나는 서울에서 수련 과정을 밟느라 더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2주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아내 28살 때 아들, 32살 때 딸이 태어났다.(참 신기하다. 별로 만나지도 못했는데. 둘 다 대단한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시부모를 부양하고, 아이 셋을 키우며, 직장 생활까지 하는 대단한 철녀였다.


@ 33살 ~ 45살 : 드디어 신혼살림을 차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시는 시부모를 지극히 봉양하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내가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해에

작은 아파트지만 관사가 나오기에 드디어 둘이 함께 살기로 했다. 물론 아들은 데리고.^^.


부모님은 여수에 그대로 계셨기에,

적은 월급으로(전문의가 되었음에도 월급이 적은 곳에 근무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부모님을 봉양하고

아이 셋을 키우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더 이상 떨어져 살 수 없었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 싫어서,

아내는 직업으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9년간의 교사 생활을 접었다.(가진 것이라고는 부모의 빚 밖에 없었던 우리가 엄청난 돈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둘 다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같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이때 그만두지 않았다면 아내는 정년 퇴직할 때까지 있었을 것이고 우린 부자가 되었을 텐데^^. 나와 아내는 조금의 후회도 없다)


내 부모의 빚을 다 갚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 기간 동안

아내는 지극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자식들을 키웠다.(함께 한 일이었지만, 나는 어차피 그런 집에 태어나서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내는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오지 않았다면 더 편히 살 수 있었을 것이기에 쉽지 않은 길을 걸었다.)


일일이 열거한 이유가 있다.(요약하고 요약한 게 이 정도이다)

아내가 며느리로서 얼마나 잘했는지를 말하고 싶어서이다.


첫인상을 그리 좋지 않게 시작한 엄마와 아내는,

내가 없이 함께 살면서 고부간의 갈등은 전혀 없었고 너무 잘 살아내었다.

처음 만난 날을 제외하고는 시어머니 노릇을 하지 않은 엄마의 공도 있었지만,

시어머니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내는 엄마에게 아주 잘했다.

오죽하면 엄마는 "딸들 보다 며느리가 훨씬 낫다"라고 하셨으니까.


실제였다.

딸들은 함께 살지도 않았고, 생활비도 용돈도 제대로 주지 않은 반면에

며느리는 함께 살았고, 아들을 둘이나 낳아 주고, 애교가 넘치는 손녀도 낳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과 함께 자신들이 진 빚도 갚아 주고, 허리띠 졸라 매어 모은 돈으로 생활비며 용돈을 부족하지 않게 드렸으니까.(지금 생각하면, 부족했을 듯싶다. 더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돌아가신 후부터 지금까지 큰 후회로 남아있다)

남친 집에 오자마자 빨랫감을 든 여친이 과연 몇이나 있을 것이며,

남편 없이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군말 없이 시부모의 빚을 갚고 봉양한 며느리는 얼마나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찾기 힘든 며느리이다.


월급 외에  수당이 생기면,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엄마에게 용돈을 드렸던 아내는

분명,

'딸' 보다 나은 '며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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