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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Apr 01. 2021

다짐

나와의 약속

타인과의 약속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과의 약속일 것이다.

나와의 약속은 어기더라도 아무도 모르고,

지키지 않아도 나는 나를 아주 쉽게 용서할 수 있으므로

가장 지키기 어렵다.

그런데, 자신과의 약속마저 지키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진심으로 타인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이다.


'작심삼일'

나도 숱하게 겪어본 일이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집에 있는 영어 책을 다 모아놓고, 동영상 강의 파일을 다운 받아놓고서

결국 원어민은 커녕 지금의 초딩보다도 못한 정도에서 끝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고자 그토록 노력했고,

50이 넘으면 아침 잠이 없어진다고 해서 나이 먹기만을 기다렸지만,

57세가 된 지금도 여전히 저녁형 인간이며 아침에 일어나는 것 힘들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심삼일'에 속할만한 다짐들은 내 인생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나와의 약속이라고 하지 않기로 한다.^^


정확한 시점이 기억나지 않지만,

10살 때쯤 '성공해서 꼭 엄마 집을 사드리고 엄마를 편하게 모셔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엄마는 한 번도 자신이 집을 가져보지 못했고, 항상 빚에 쪼들리며 사셨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아버지가 마을금고를 비롯한 금융권과 사채업자들에게 빚을 내었고, 빚이 계속 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빚을 내가 갚아야 된다는 다짐을 했다. 나는 1남 3녀의 장남이었으니까.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결혼을 빨리해서 자식을 빨리 낳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 40살 때 내가 태어났고,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했었기에 

어릴 때부터 많은 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육성회비도 제때 내지 못했고, 학용품도 제대로 살 수 없었기에 아끼고 또 아껴 써야 했다. 친구도 잃었고, 5학년 때부터 쌀 배달을 했다.)

나는 꼭 자식을 빨리 낳아서 내가 조금이라도 젊을 때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며 잘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고등학교 때 했다. 발랑 까져가지고...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려 했는데, 데모도 하고 하다 보니 졸업이 2년이나 늦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계획상 26살 때 결혼해야만 했기에, 본과 2학년 겨울 방학 때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여름방학 때 양가를 설득했다.(돈이 없는 우리 집이었기에 대학교 가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온갖 난관을 뚫고 계획대로 26살 되던 해 2월 4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27살 5월에 이번에 결혼한 첫 아이를 낳았다.


우리 집 빚은 계속 늘어만 갔다. 이대로 두어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아버지께 강력히 건의하여 빚만 늘어가는 장사를 접게 했다.

문제는 빚이었다. 

아내가 여수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기에 일단 여수에 전세 집을 얻어 함께 살기로 하고,

그동안 아르바이트하며 모아 놓은 돈과, 장사 정리한 돈, 매형에게 사정하여 얻은 돈 등으로 겨우 금융권을 해결하고, 사채는 사채업자들을 만나서 내가 갚아준다는 각서를 쓰고 해결했다.

나와 아내는 이 빚을 갚고 자식들 키우고 부모를 봉양하여야 했기에,

결혼 직후부터 8년 동안 신혼살림도 차리지 못하고 8년을 격주 부부생활을 했다.

그리고, 빚을 다 해결했다.

한참 전문의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세 살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나가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훈아! 네가 집 사준다고 했응께 집 사주믄 안되겄냐?"

대학 졸업한 지 6년, 아내가 교편 잡은 지 9년. 

그동안 빚을 갚느라 많이 모으진 못했지만,  그래도 지방이라 23평짜리 빌라형 아파트(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총 12세대)를 살 수 있었다. 13년 후 이 집을 팔 때 오히려 손해보고 팔았다.ㅠㅠ


고등학교 이전에 다짐했었던 것, 과연 그대로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던 것들을

확실하게 지켰다.



이것들에 비하면 더 불확실한 다짐을 했었다는 것을,

대학 때(23살 때) 도보여행 시에 적었던 여행기를 보고서야 알았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23살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때까지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나로부터 받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여유와 멋과 즐거움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이런 것이야 지키는 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을 낳지도 않았고, 여자 친구와 사귄 지 2년 좀 넘었는데,

내 자식들의 튼튼한 디딤돌 역할을 충분히 하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단다.

내 자식들만큼은 나와 다르게, 

아무런 고민 없이 자신들이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여기까지야 그렇다 치자.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난무하던 세상이었고,

셋째부터는 의료보험도 안 되는 시절이었는데,

둘을 낳을 생각을 했다가, 허락이 된다면 2남 1녀를 낳겠단다.

이거 뭐 까져도 한참 까졌고, 허무맹랑도 도가 넘었다.


그런데, 난 이 다짐을 완벽하게(이건 사실이다) 지켰다.

셋째를 낳을 때는 그 해부터 셋째도 의료보험 적용이 되었다.

물론 가족 수당은(난 군인이었고, 아내는 교사였다) 둘째까지만 지급되었지만...

국가가 허락했다고 해야 할까?^^


나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많다. 

다행인 것은 인생에 영향을 그리 미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글을 쓴 이유는

'쉽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내가 이 정도로 열심히 살아왔구나'라고

나에게 칭찬을 듬뿍 해주고 싶어서이고,

내 자녀들이(이번에 자녀 한 명 더 늘었으니) 

이 글을 읽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길 만큼 열심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물론,

우리 브런치 작가님들께 쓰담쓰담받고 싶은 마음도 크다.^^


이 다짐들을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아내의 헌신임은 두말 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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