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는 날은 ‘긴장’하는 날

by 서옹

요 몇 년, 아내는 김장하는 중에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자기 최면하는 건지 매번 “김치, 이제 사서 먹을래” 한다. 나이 들어 김치 담는 게 힘들다는 투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는 나 모르는 새 뚝딱 해내고 선 말이다.


작년, 은퇴해서 처음 맞은 김장 날에는 시작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아내는 매년 통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았는데, 처음으로 절임 배추를 산 모양이었다. 주문량 대중을 잘못했는지 연신 “왜 이렇게 양이 많아?”하며 당혹해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 듯해 눈치 빠른 나는 양념 준비하는 아내에게 “무채 써는 거 도와줄까?”하고 자청했다.


나는 즉석에서 아내에게 채칼 쓰는 법을 배워 난생처음 무채를 썰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은 도움에 아내도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이제 내 임무는 끝났다 싶어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부엌 쪽에서 두세 번 연속“큰일 났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많은 절임 배추에 양념을 채우고도 여전히 남은 배추들을 보고 아내가 양념이 부족함을 알아챈 것이다.


나도 덩달아 긴장해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해? 방법은 있어?”하고 걱정에 가담했다. 그때부터 아내의 신공(神功)이 시작됐다. 갑자기 냉장고에 있는 고춧가루, 파, 마늘, 양파, 젓갈 등을 탈탈 털어 수색하듯 찾아 양념 양 부풀리기에 들어갔다. 늘린 양으로도 부족했는지 아내는 재물 조사하듯 수시로 남은 배추 수를 확인하고 귀하고도 귀한 양념을 아껴가며 채워 넣기를 계속했다. 나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배추에 양념을 채워 넣고는 아내가 또 “이제 진짜 파는 김치 사 먹을 거야” 했다. 나도 “그래, 그렇게 하자”하며 맞장구 쳐 줬다.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하는 날이 돌아왔다. 예약 주문한 절임 배추가 시간 맞춰 도착했다. 드디어 김장이 시작된 것이다. 부산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내의 표정에 여유가 넘쳤다. ‘김치 사 먹을 거야’라는 말도 없이 그저 평온하니 더 긴장됐다. 작년 생각이 나 “무채 썰어줄까?” 하니 “그래 주면 고맙구” 했다. 무채를 다 썰고 나서도 나는 자리를 뜨지 않고 양념 준비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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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하는 날이 돌아왔다. ⓒ 정승주

출출해서 시간을 보니 어느덧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마침 이발하고 집에 들어오는 둘째를 보고 “오늘은 김장하는 날이라 저녁을 김밥으로 때우자. 귀찮겠지만 가게 가서 김밥 좀 사 올래?”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녀석도 눈치가 있어선지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밥이 도착하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인 라면을 정성스레 끓였다. 세 식구가 간만에 김밥과 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여전히 평온했다. 아니 아내 표정이 오히려 평소보다 좋은 듯싶었다.


배추에 양념 채우는 작업 때도 나는 아내를 도왔다. 양념 채우기 편하게 수시로 배추를 갖다주고, 김치가 되어 통에 넣어져 가득 채워지면 양념 묻은 통 테두리를 깨끗이 닦고 뚜껑을 닫아 구석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양념 채울 배추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내 눈에는 여전히 제법 많은 양념이 남아 있어 보이는 게 아닌가. 다시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과는 반대로 양념이 남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싶었다. 아내에게 “배추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양념이 제법 남아 보이네”하고 조심스레 물으니, “남으면 보관하다 다른 데 쓰면 돼”하며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이 대답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김장을 마무리하고 내 긴장도 끝났다. 아내에게 “올해는 김치를 사서 먹겠다고 안 하네” 하니, “당신과 애들이 사서 먹는 김치 싫어하잖아” 하면서 “나도 그렇구”하고 덧붙인다.


순간 멍했다. 아~ 뻥 이었다니! 애당초 눈치 보며 긴장할 일이 아니었다. 일이 좀 힘들었을 뿐이었는데.

그래도 소득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더는 김장하는 날에 긴장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부터는 김치가 떨어지면 당당히 요구해야겠다. 몸 아끼지 않고 도울 테니 김치 담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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