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자인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보내는 게 주된 일상이다. 집안을 훑어봐도 한 직장에서 연구직을 업으로 삼십여 년을 일했던 흔적은 이제 찾기 어렵다. 은퇴하며 전공 서적, 보고서, 갖가지 자료를 모두 후배들에게 물려주었거나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스스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 바에는 미련을 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삶에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가끔 현역 때의 일 흔적이 마음에서나마 끄집어내어질 때가 있다. 전 직장의 요청으로 보고서를 평가할 때나 회의에 참석했을 때다. 현역 시절처럼 자문하고 평가하는 순간만큼은 은퇴자 신분을 잊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이 끝나면 흔적은 온데간데없어진다.
2주 전쯤이다. 전 직장의 아끼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외부 기관으로부터 요청받았다며 자기와 팀이 되어 원고 작성하는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단순히 기고문이 아니라 자료 조사나 얼마간 분석이 요구되는 원고청탁이었다.
후배가 요청했을 때 맨 먼저 든 마음은 고마움이었다. 일을 놓은 지 3년이 넘은 나를 잊지 않고 배려하는구나 싶어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사용기간이 지난 녹슨 장비인지라 한편으로 민폐나 되지 않을까 싶은 노파심도 올라왔다. 그 마음을 비쳤는데도 후배는 같이하자 했다. 범위가 넓어 각자 역할을 나누어 써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 능력을 믿어주는 후배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착수를 위한 첫 미팅이 잡힌 엊그제, 나는 출근이라도 하듯 전철을 타고 서울역 근처 약속 장소로 갔다. 일의 요청자, 연락한 후배 그리고 또 다른 후배(교수)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현역으로 있을 때 같이 일해본 후배들이라 오랜만의 만남에 더욱 반가웠다.
ⓒ 정승주
함께 일할 팀은 전 직장 후배, 후배 교수 그리고 은퇴한 나까지 셋이었다. 발주를 추진하는 후배가 먼저 일의 성격과 내용을 설명했다. 들어보니 10여 년 전에 여러 기관이 공동으로 방대한 양의 발간물을 출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참여해 수행한 일과 성격이 유사했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말했고, 그 발간물의 내용 중에 우리가 작성할 내용도 일부 들어가 있어 참조하면 좋을 거라 제안했다. 발주자도 공감이 되는지 메모했다. 전 직장 후배에게는 팀에서 책임자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현실을 가장 잘 꿰고 있고 누군가 조타수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아뿔싸, 후배가 과업의 세부 내용을 정리하고 각자의 역할을 나눈 걸 보여줬다. 이미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임에 나온 후배들 모두가 각 분야에서 대가임을 내가 놓친 것이다. 늙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는 말이 속설이 아니라 진리임을 새삼 확인했다.
어떠하든 좋았다. 같이 일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좋았다. 이야기하다 보니 현역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회의에 참석할 때 드는 희미한 흔적이 아니었다. 현역 때처럼 과업을 잘할 수 있다는 도전 의식과 잘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함께 솟는, 뚜렷한 흔적이었다.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다시 몰려왔다.
그래도 부담스러움이 마음 한편에 스쳤다. 일을 놓은 지 오래돼 감도 떨어지고 관심도 줄어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명색이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세월 동안 한 우물을 팠는데 실력이 어디 갈까? 하고 스스로 다독였다. 부족하면 남는 게 시간인데 조금 더 시간을 들이면 되지 여기니 마음이 편해졌다.
반갑고 즐거운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전철을 탔다. 마침 자리가 있어 앉으니 어떻게 하면 이번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은 생각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현역 때의 일하던 자세로 돌아간 듯했다. 건너편에 앉은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괜히 으쓱해지고 좋은 기분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