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둘이지만 요즈음 집이 빈 듯한 느낌이 자주 든다. 큰아들은 독립해 따로 살고 있고, 작은아들 역시 복학해 낮에는 집에 없는 경우가 많아서지 싶다.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였다. 아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실제 생일은 그보다 이틀 전이었지만 직장 다니는 큰애 때문에 미룬 것이다.
애당초 나는 루틴대로 외식하자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내가 반대했다. 큰아들이 식당 밥만 먹고 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했다. 며칠 전 아들이 전화했을 때 집에서 먹자고 했단다. 엄마의 자식 사랑을 어떻게 말리랴.
저녁 어름에 큰아들이 왔다. 아내가 부산해 지기 시작했다.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에 자기 생일날조차 요리해야 하나 싶어 짠했다. 순간 내가 요리법을 배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식탁에 모두 모여 앉아 식사하니 집안이 꽉 찬 느낌이었다. 간만의 집밥이어선지 큰 녀석은 참 맛나게 먹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아내는 후식으로 애가 좋아하는 시원한 멜론을 내놨다. 아내 생일인지 아들 생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식사 후 작은 녀석이 준비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세 명의 남자가 엇박자 삼중창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남자 셋이 내는 굵은 스타카토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아내는 촛불을 힘껏 불어 꺼뜨리며 호응했다.
꼽아보니 이번 생일이 결혼하고 서른한 번째다. 나를 만나 삼십 년 세월 동안 아내가 겪은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결혼 이듬해 일어난 예상치 못한 입원과 수술 그리고 이어진 일여 년의 약물 치료, 나의 때늦은 유학 강행에 하필 IMF 외환위기까지 겹쳐 유달리 힘겨웠던 외국살이, 귀국해 살만할 즈음 닥친 암 발병과 지독한 항암 치료 그리고 아직도 괴롭히는 후유증. 생각하면 할수록 아내의 고생이 내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다. 그래도 밝게 사는 걸 보면 분명 아내는 대단한 여자임이 틀림없다.
ⓒ 정승주
케이크를 나눠 먹은 거로 행사(?)가 끝났다 싶어선지 작은 녀석은 제 방으로 들어가고, 큰 녀석도 안방 침대에 자리 잡고 핸드폰을 본다. 두 아들 역시 예외없이 무심한 남자다. 새삼 딸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싶다.
한두 시간이나 흘렀을까. 큰 녀석이 가겠다 한다. 내일이 일요일이라 자고 가도 될 듯한데. 아내는 부산하게 직접 담근 매실액과 홍삼액을 챙긴다. 혹시나 가져가다 샐까 싶어 꼼꼼히 싼다. 애잔하다.
큰 녀석이 떠나고 나서 내가 “사위가 들렀다 간 것만 같네” 하니 아내가 인상을 쓰며 말한다.
“내가 자식이 어른이 되면 정을 떼주는 게 사랑이라 했지!”
맞다. 또 깜박했다. 법륜 스님이 그랬던가. 자식은 태어나서 어릴 때 안겨준 기쁨만으로 제 도리를 다한 거라고. 그러니 성인이 된 자식에게 부모는 '정은 떼주고 대신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된다'고 수도 없이 아내와 함께 되뇌었는데 말이다.
미안했는지 갑자기 아내가 “당신, 몰랐지?” 하며 귓속말로 자랑하듯 덧붙인다.
“큰애가 엄마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돈 보낸 거…”
역시 ‘아들은 계획이 다 있었구나’ 싶었다. 거실에 있는 15년 전쯤 찍은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큰 녀석과 작은 녀석 그리고 아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