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온갖 새 상품이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온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뭐라도 사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어딜 가도 ‘신상’ ‘신상’ 하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5년 넘은 핸드폰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는다.
어렸을 때는 새 물건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살 수 없는 형편이라 금지를 욕망해서 그랬을까? 명절이면 부모님이 시장에 데리고 가 새 옷이나 새 운동화를 사줄 때 날아갈 듯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친구 집에서 카세트 라디오를 처음 접하며 갖고 싶어 했던 장면도 떠오른다. 친구가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버튼을 누르자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그때, 친구가 참 부러웠었다.
이십 대 중반, 첫 직장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원하는 무언가를 살 수 있다는 게 뿌듯하고 좋았다. 하지만 검소한 편인 데다 결정장애가 있어 많이 사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사주는 대로 그저 쓰기만 해서 그렇지 싶다.
짧은 첫 직장과 대학원을 거쳐, 두 번째 직장생활 4년 만에 생애 첫차를 샀다. 중고차가 아니라 폼나게(?) 새 차를 샀다. 비록 경차(티코)였지만 첫차는 아내를 만나 달콤한 연애 시절을 보낼 수 있게 해줬다. 광고처럼 ‘작은 차, 큰 기쁨’이었다. 이후로도 나는 새 차만을 고집했다. 심지어 프랑스 유학 시절에도 돌콩 크기만 했지만 새 차를 몰았다. 지금까지 4대를 샀어도 내 차 목록에 중고차는 없다.
결혼해서는 신상(품)을 제법 많이 샀다. 옷에서부터 가방, 구두, 각종 액세서리까지 모두 아내가 골라 사줬기 때문이다. 새 물건을 좋아하는 건 변함없었지만 누군가에 의존하는 건 여전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새 물건이 시들해지고, 대신 새 생명들에 눈길이 갔다. 봄날의 연푸른 새싹과 새잎,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 금방 터뜨릴 듯한 꽃망울을 볼 때면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이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슬픈 듯한 애잔함도 함께 묻어왔다. 모든 생명은 예외없이 아름답지만 대가로 고통과 죽음이 어른거려서였을까. 아니면 인생이 고달파서 그랬을까. 돌이켜보니 그때 내 나이 마흔 중반 즈음이었다.
ⓒ 정승주
다시 어느 순간부터 물건으로 관심이 돌아왔다. 새것이 아니었다. 오래되고 낡은 것에 눈이 갔다. 빈티지가 좋아졌고 중고품에 손이 갔다. 그즈음 내게 불청객도 찾아왔다. 피부 알러지였다. 자연스레 헌 옷이 좋아졌다. 하루는 러닝셔츠가 구멍이 날 정도로 낡아 아내가 버리라 했지만, 나는 그 후로도 한참을 입었다. 새옷을 사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그건 나만이 아니었다. 아내도 그랬다. 당근마켓에서 낡은 장식장을 사거나 골동품 같은 물건들을 샀다. 심지어 쓸모없을 것 같은 아주 오래된 뒤주도 샀다. 다시 돌이켜보니 내 나이 쉰 중반 즈음이었다.
얼마 전 TV로 윔블던 테니스 경기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노장 선수를 응원하고 있는 나 자신에 놀랐다. 혈기 왕성한 젊은 선수에게 노련미로 대항하는 힘겨운 몸짓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이었을까. 오래되고 낡은 것은 생명이 있든 없든 쓰임새의 마지막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련함 때문이어설까.
요즈음 어쩔 수 없이 늙으면 쓸모가 없어지는 건가 싶은 마음이 종종 든다. 그럴 때면 에너지보존의 법칙(열역학 제1 법칙)에 빗대어 새것이든 낡은 것이든 젊든 늙든 쓰임새가 다를 뿐 쓰임은 변함없을 거라 달래본다. 나무가 광합성으로만 존재의 쓰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유기물로 바뀌며 또 다른 역할을 다하듯 말이다.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나로서도 이제 쓰임새가 바뀌어 가고 있음을 확연히 느낀다. 현역 때는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돈을 버는 쓰임새가 컸다면 지금은 아내를 도와주고 글을 쓰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쓰임새로 바뀌었다. 그래서다. 설령 쓰임새가 줄어들어도 주눅 들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머지않아 비록 나로 알던 나는 수명을 다하겠지만,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라 내가 바뀌는 것일 뿐 여전히 쓰일 거라 믿자. 자연의 한 조각으로 그저 쓰임새만 달라질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