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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Sep 12. 2022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스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맘때쯤이면

초복, 중복, 말복을 겨우 넘기고

살아남은 개처럼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이란 시가 떠오른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절이 바뀌는 나라에 살고 있고,

바람과 햇볕, 눈과 비에 따라

권태로운 일상이 조금씩이나마

변할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다가 그랬다.

'10억을 얻을 수 있다면 너는 무엇을

팔 것인가?'라는 화두가 나왔다.

(강남에서 20평대 아파트 하나

사지 못할 돈, 우린 고작 10억이었다.)


질문의 뼈대는 신화다.

그렇다면 응당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 함은 자명하다.

난데없이 10억과 맞바꿀게 뭐가 있나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줄 게 없는 거다.


다행히(?) 나는 친구 L처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도 없고,

몸이 재산이라는 친구 P처럼

팔 하나를 떼어 바칠 용기도,

사랑하는 사람을 불구덩이로 보내겠다는

친구 J처럼 잔혹함도 갖추지 못했다.


저 셋 중에 하나는 갖추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 세상의 잔인함과

세월의 매정함을 어찌 견디려고 하는

것인지. 새삼 두려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들이 소중한 것을

신께 바칠 때, 나는 잃을 것이 없으니

다행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평범한 인간일지라도

신이 사 줄만한 값어치 있는 것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는 게 아닌가.


새삼 아무것도 없이 여기까지

잘도 왔다는 안도감마저 드는 날이다.



# 이성복 #그 여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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