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詩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집에서 차로 5분 정도 달리면 강변이 나온다. 물론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보이는 강이다. 완만한 등선을 이루며 흘러가는 강물을 가까이서 보고 싶을 때나 소위 물멍을 때리고 싶을 때 자주 산책하러 나온다.
아이들에게 문학 수업을 할 때 강을 인생에 비유해 주곤 한다. 시작과 끝이 있고, 거꾸로 흐르지 못하고, 종착지를 향해 흘러가는 긴 여정이라는 점에서 강과 우리는 많이 닮아 있다.
특히나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삽자루 하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에 강물과 해질녘이 더해져 비애감은 두 배가 된다. 아이들은 이 비애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 그 나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리라.
시에 등장하는 중년의 노동자처럼 삶에 눌리고, 썩은 샛강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서 놓여나는 방법은 체념뿐이다. 역설적이지만, 체념은 약이 된다. 항생제처럼 오남용 하면 삶에서 낙오되는 부작용이 있지만, 적당한 체념은 항산화작용을 일으킨다.
체념은 반드시 아픔이 동반된다. 그러나 아픔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강도에서 그리고 차츰 빈도에서 줄어들다가 어느 날 문득, 견딜만해질 날이 온다. 아픔의 깊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런 날은 반드시 온다. 그래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전쟁하듯 치러낸 사랑과 이별들,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고독, 나를 유폐시키는 지지부진한 글쓰기에서 확인된 못남과 무능력함, 갈수록 가속이 붙는 시간들, 눈가에 잡히는 주름 하나, 내가 체념했던 순간들을 하나씩 떠 올려 강물에 씻어 본다.
조용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여백 같은 이 산책 시간이 좋다. 칼이 칼집에 익숙해지듯, 강을 바라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정해진 길을 따라 흐르는 강물처럼 스스로 깊어져야만 한다.
꽤 오랜만의 산책에 스마트 워치가 자꾸 소식을 보낸다. 1000보, 2000보... 5000보... 너무 멀리 왔나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생각들을 강물에 흘려보내고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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