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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Jul 05. 2023

접시꽃이 피었네

촉규화


거친 밭 언덕 쓸쓸한 곳에

탐스런 꽃송이 가지 눌렀네.

장맛비 그쳐 향기 날리고

보리 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수레와 말 탄 사람 그 누가 보아 주리.

벌 나비만 부질없이 엿보네.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최치원 詩 <촉규화>


*촉규화 : 접시꽃





아파트 화단에 접시꽃이 피었다. 자잘한 풀꽃들 사이에 삐죽이 껑충 키가 큰 접시꽃이 피었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접시꽃은 탐스럽게 피지만 길가나 화단에 흔히 자라는 꽃이다.


최치원은 5언율시 <촉규화>에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스스로가 천한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관대작들은 자신을 찾지 않고 애꿎은 벌 나비만이 모여드는 것을 한스러워하며 스스로를 접시꽃에 비유했다. 그리고 주어진 운명에 대결하지 않고 순응하고 체념함으로써 우리네 '한'의 정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신의 학문은 탐스러운 꽃송이처럼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건만 이를 알아주지 않는 척박한 시대의 풍토가 한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6두품이라는 한계에 부딪친 그는 미관말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전국을 유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누군가는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최치원을 환상적인 몽유록계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해운대 동백섬 바위에 최치원이 남긴 석각


꽃은 자랑이다. 뿌리는 척박한 땅에 얼굴을 처박고 양볼이 홀쭉해지도록 물을 빨아올려 자신보다 더 탐스러운 꽃을 피워낸다. 그러나 지나가는 뭇사람들이 흘깃 쳐다보는 눈길 한 번과 미소 한 번이 보상의 전부다.


몇 가닥의 뿌리와 가늘디 가는 가지에 비해 너무나 큰 꽃을 매달려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저 자기에게 맞는 적당한 크기의 꽃이 핀 것에 만족하면 좋으련만, 크고 탐스러운 꽃송이를 주렁주렁 피워 가지를 누르길 원한다. 때론 그것이 강박이 되어 자찬과 허세를 부리는 이들도 더러 만난다. 


산책길에 다양한 야생화를 만난다 왠지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할 것 같아 꽃이름을 알려주는 앱을 켠다 시계방향으로 금계국, 기린초, 분꽃, 핫립세이지라고 한다


꽃은 욕망이다. 큰 꽃송이를 피워야겠다는 집착을 버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저 깊게 내리지 못한 내 뿌리에, 백로의 다리처럼 가는 내 가지의 크기에 어울리는 꽃을 피우고 있는 지금, 행복하다 아니 행복해졌다. 산책길에 만난 저 풀꽃들처럼...


꽃망울 하나 터지는데도 온 산이 아프기는, 접시꽃도 이름 모를 풀꽃도 매한가지다.



#최치원 #촉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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