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가던 강가의 산책길을 반대로 걸었다. 그랬더니 만난 풍경이 철쭉이다. 한 번도 예쁘다거나 가련하다거나 생각해 본 적 없다. 진달래는 소월의 시로 유명하니까 그 생김을 눈에 담고 있지만, 그와 유사해 보이는 철쭉은 꽃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염두에 둬 본 적 없는 꽃이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자세히 본다. 색깔도 여리여리한 색이 아닌 시골 장터에서 파는 플라스틱 바가지 같은, 변두리 식당에서 밑반찬을 옮겨 놓는 어느 이모님의 손톱 끝에 칠한 매니큐어처럼 쨍한 분홍색이다.
문순태의 <철쭉제>란 소설을 수업할 때 늘상 철쭉은 민중의 꽃으로 설명한다. 가난한 민중들이 봉기한 날 저녁, 손에 횃불을 들고 산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토벌대들의 눈엔 마치 붉은 철쭉이 산을 돌려 피어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철쭉처럼 흔들리는 횃불꽃들은 민중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르긴 몰라도 토벌대들은 그 철쭉이 조금은 두려웠으리라.
그 지리산만큼은 아니겠으나 끝없는 철쭉들의 행렬을 본다. 강바람이 분다. 철쭉들이 움직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횃불이 춤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해 질 녘이면 조금 더 처연하게 보였으려나. 저녁이면 왠지 쓸쓸해져서 가급적 산책을 하지 않는데, 저들을 보러 한 번 나와볼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는데 저 분홍꽃은 철쭉을 원예용으로 개량한 영산홍이라고 한다. 나는 모두 철쭉인 줄 알았다. 산철쭉과 섞여있어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잎모양과 꽃모양이 조금 다르다. 다른 꽃인 줄 모르고 모두 철쭉으로 본 내 무지함에도 저들은 개의치 않는다. 다음에 보면 제대로 이름을 불러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시인의 말처럼 '흔들린다'는 것은 살아있는 증거다. 어렸을 때는 여러 것들로부터 많이도 흔들렸다.그 흔들림은 자책이 되고, 그 자책은 또다시 나를 흔들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인 줄 알았는데 지금도 가끔 낯선 일에 마음 상하고, 흔들리고, 자책하고, 눈물 뿌린다.
철쭉과 영산홍은 헷갈려도 그만이지만, 내가 걸어가는 길은 제대로 보아야 한다. 혼자 걷는 인생이란 철쭉들 속에 끼어있는 영산홍 같다. 얼른 봐선 잘 보이지 않기에 꽃잎과 꽃받침, 잎의 모양까지 잘 살피며 걷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끔은 철쭉이라불려도, '뭐 어떠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도 알아야겠다.
다시 한번, '산다는 것'은 '흔들린다'는 것의 동어다.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흔들릴 테다. 그러나 꽃은 흔들려도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나를 잃지 않을 정도로만 나부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