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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Mar 25. 2022

누군가가 내게 유산을 남겼다

새벽녘에 전화벨이 울리거나, 올 사람이 없는데 초인종이 울릴 때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놀라거나 신경을 쓴다. 원래 예민한 성격이기도 하고, 새벽에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듣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달려가며 생긴 일종의 불안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 오전 시간, 초인종이 울려 나가 보니 우체부가 등기우편을 가지고 왔다. 봉투에는 'ㅇㅇ변호사 사무실'이라고 쓰여 있고 수신인엔 내 이름이 쓰여있었다. 변호사가? 왜? 누가 나를 고소했나? 설마! 법의 법자와도 관련 없는 삶을 살아온 내게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낸 한 통의 등기우편은 봉투를 뜯는 그 짧은 시간 오만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긴장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ㅇㅇㅇ씨의 유산 상속과 관련하여 통화를 원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유산? ㅇㅇㅇ씨가 나에게 유산을 남겼다고? 헉!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 친아버지가 아닌가? 나와 성씨가 같은 이 분은 도대체 뉘신지? 혹시 신종 사기인가? 전화번호를 앞에 두고 또 오만 고민에 빠졌다.


싱겁게도 궁금증은 동생에 의해서 금방 풀리고 말았다. 혹시 들어본 적 있느냐고 동생에게 우편을 보여주니 "아! 만화가 할아버지다."라고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이 분 댁에 가 본 적이 있는데, 머리에 베레모를 쓴 전형적인 그림 그리는 화가의 모습으로 동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삼십여 년 전에 돌아 가신 나의 친할아버지는 독수리처럼 5형제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형제들과 드물게 왕래가 있었던 모양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나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거의 얼굴도 뵌 적이 없었으니까. 할아버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계시던 막내 할아버지가 최근에 돌아가셨고, 그분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상속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법정 상속인인 형제들께 유산이 상속되었고, 돌아 가신 우리 할아버지의 상속분이 우리 아버지와 고모들께 내려왔다.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상속분은 또 나와 동생에게 내려와 이 기나긴 핏줄 찾기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돌아 가신 막내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독립해 형제들과도 왕래가 거의 없었고, 독신으로 살면서 만화를 그리셨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했다고 하니 증조할머니께서 꽤 늦게 할아버지를 낳으신 게 아닌가 싶다. 그리 이름난 만화가는 아니지만 기관지에 오래 연재를 하셨다고 한다. 강남에 꽤 비싼 아파트를 소유하고 계셨고 돌아가신 후 그 아파트를 처분해서 할아버지 형제들의 자녀들에게 골고루 유산이 돌아간 것이라고 변호사가 전해주었다.


어쨌거나 한 번도 뵌 적 없는 친척 할아버지께서 나와 동생에게 수천만 원의 유산을 남기셨다. 상속받은 이들 중 누구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고 그러니 부고도 없었고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유산을 상속받았다는 기쁨보다는 그분은 어떻게 생을 마감하셨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분의 삶을 증언해줄 분들이 안 계시니 나의 궁금증은 영영 풀길이 요원해지고 말았다. 다만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가족들이 있어 그분의 영혼을 따뜻하게 보내 주셨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남들은 늙어도 나는 늙지 않을 것 같고, 남들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몰라도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명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친척 할아버지의 유산상속과 관련된 일을 겪으면서 나는 인생의 마침표를 어떻게 찍게 될까를 계속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여러 가지 장면의 퍼즐들을 조각조각 맞추면서 나의 오만함도 실컷 비웃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다독이기도 한다. 진정 소중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 상처 주었던 일들이 떠 오르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 본다. 물론 곧 잊어버리고 똑같은 잘못을 스스럼없이 또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마다 꺼내서 닦을 마음의 거울이 생긴 셈이다.


얼마나 사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가를 들여다보게 될 거울을 나는 유산으로 받았다. 물론 내 통장에 찍힌 몇 개의 동그라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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