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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2411210421

by ODD

오랜만에 진심과 만났다.

몇 번이나 반복된 진심 속 진심의 프랙탈 너머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다.

이 정도의 만남은 오랜만이라 이 이야기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필요성을 느껴서 오랜만에 상상의 대화가 아니라, 현실의 대화를 했다.

혼자서 소리를 내며 대화할 때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 하자면, 일단, 스스로의 각인이다.

내가 이야기 한 것들에 대해서 더 명확하게 전달받고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다음은 지금의 나를 볼 수 있을 수도 있을 현재 혹은 미래 혹은 과거의 타인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단, 내 언행을 지켜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게 더 합리적일 테니까.


오늘의 시작은, 그러니까, 나와의 대화의 시작은 새벽에 시작됐다.

술은 좀 들어갔다.

시작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차분한 특별함이었다.

갑자기 비약해서 미안하지만, 갑자기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겠다.

갑자기 내 마음에 색이 칠해졌다.

이 갑자기라는 단어 안에는 내 오랜 시간들과 여러 감정들이 농축되어 있긴 하지만.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살아있는 인간처럼 감정적으로 사고했다.


야한 사진을 봤다.

난 AI로 생성된 가상의 야한 사진으로 자위를 한다.

그편이 좀 더 채식 같기도 하고.

난 야한 것에도, 성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내가 생물이고 남자고 이성애자라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스스로 거부하고 잘라내고 태워내도 죽지 않는 본능이라는 부분이 있다.

난 스스로 내 성적 본능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자의적으로 정신적 거세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고, 그에 걸맞은 결과를 냈다고 자신한다.

그럼에도 남아있다.

이런 이유로 내가 스스로를 혐오하기도 하는 것이다.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없었던 것도, 되지 못 한 나를 되고 싶은 내가 될 때까지 몰아세우는 것도.


예전부터 일반적인 야한 동영상은 날 슬프게 했다.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로, 그 존재가 숨기고 싶어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내 본능을 세상에 전시해 놓은 느낌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싫어했지만, 다시 찾게 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무력감을 느꼈는지.

난 오늘 자위를 하면서도 늘 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아, 진짜 지랄 맞네.”

사진은 가짜고, 확대하면 픽셀이지만, 내가 느끼는 이 감각은 성적 흥분.

식욕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오랜 시간 동안 먹지 못 해, 불편함을 넘어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운 그 상황에서 내 목 너머로 뭔가를 삼키며 날 살리는 행동을 취함과 동시에 느끼는 그 살생의 감정.

동물을 먹긴 싫어서 그나마 식물을 섭취하려 하지만, 이게 무슨 차이인가 혼란도 들면서, 의미가 있긴 한가 싶다가도, 그나마 나는 식물을 먹으니, 야만스럽게 동물을 죽여 먹는 쟤보다는 나은 건가 싶으며 드는 생각은.


‘아, 진짜 지랄 맞네.’


다시 말하지만, 난 야한 것에도, 성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내가 지닌 본능이 인간이고 남자고 이성애자라서, 죽이고 죽여도 남아있는 그 본능이 노래를 한다.

내가 듣지 않는 유일한 장르인 발라드와 사랑 노래가 사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고 돈이 되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거부해도 본능의 노래는 이미 유명하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내 젊은 생각과 맞닿았다.

내가 스스로를 인간과 분리하기 시작했던 그 젊은 생각.

난 내가 노력하고 싶은 부분에 있어서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인간이다.

그 노력의 방향에 대해선 서로가 드는 생각도 할 말도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난 내 생각과 믿음, 그 신념에 대해 계속해서 수정과 발전을 거듭하고 내 존재에 의미를 그곳에서 찾을 정도로 실천하는 인간이란 말이다.

그런 내가 일반적인 저들과 같은 존재라는 걸 인정할 순 없었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내가 저들과 행동을 같이하며 섞여 들던지.

내 정신과 언행을 관철하며 저들과 나를 분리하던지.

그래서 난 후자를 선택했다.

도저히 전자는 선택할 수 없었다.

여기서 또 이어진 생각.


인간에게 ‘더’라는 것은 발전이자 퇴화이자 인류의 불같은 존재다.

사용법에 따라서 문명을 발전시켜 줄 수도 있지만, 모든 걸 죽여버릴 수도 있다.

‘더’는 나아간다는 것이다.

현재를 잊고 미래로 넘어가는 거다.

미래로 넘어갔다면 그건 새로운 현재가 되고, 과거는 잊은 거다.

이전 전 문장에서 과거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것처럼.

자극이란 게 그렇듯, 내가 10까지 왔으면 11을 원하고 12, 13... 그러면서 어느새 잊어버린 1.

무작정 자극을 쫓기에도 불안한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최대 자극이 100인데, 만약 자극의 최대치가 1억을 넘어 끝이 없는 거라면...

그래서 초심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다시 1로 돌아가면 2의 소중함과 3의 특별함과 4의 놀라움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된다.

멍청하게도, 명석하게도, 얼마든지 이 과정을 반복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너무 늦지 않은 시기와 충분한 노력이 따라준다면.

다시 돌아와서 ‘더’.

내 입장에서 저들은, 아니, 한 번쯤은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여기에 당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미안합니다만.

내 눈에 보이는 당신들은

아니, 취했네요.


그래서 서로를 분리하는 후자를 선택했고, 아무도 없는 저곳에 가기로 한지가 벌써 얼마나 됐는지.

내가 누군가를 혐오하는 만큼 내가 혐오 받을 것도 얼마든지 각오하고 있고, 당연히 동정받을 생각도 없다.

그냥 이런 곳에 있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공유할 테니, 혼자만의 길을 갈 사람이 있다면 참고를 했으면 하기도 하고, 일반적인 판단을 정상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특별해 보이는지 내 눈알을 공유하고 싶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울음.

지난 6, 8개월 만에 놀랍도록 울게 됐는데, 왜 우는지 감도 안 잡힌 채로 울었던 건 거의 2, 3년 만인 것 같다.

왜 우는지 스스로 생각하다 보니 오늘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

뭐, 시간을 세어본 건 아니지만, 참을 수 없는 울음을 약 40분 정도 쏟아냈던 게 스스로 얼마나 위로가 됐던지.

그 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이자, 그걸 이해해 주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 됐었다.

웬만하면 이런 내 정신 밑바닥에 있는 이야기는 상세하게 적지도 못하고, 적더라도 전부 그대로를 공유하지는 못하는데, 이 글을 공유하게 된다면 처음이 될 거고, 아마 마지막이 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슬픔의 기쁨과 그 특별함을 공유하고 싶은 ‘지랄 맞은.’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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