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아이인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엄마를 오랫동안 이해하고 싶었다. 나이가 곧 40세가 되는데, 아직도 엄마한테 "나한테 그때 왜 그랬어?" 하기엔 너무 철부지 아닌가. 나도 딸을 둘이나 키우는 엄마인데...
딸을 낳아보니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도 나처럼 딸이 소중했을까?'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면, 아마도 추측컨대 매우 소중했을 것이다. 보통이라면 엄마의 사랑은 성별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이다. 나는 아들을 낳아본 적은 없지만, 자식은 그냥 내 자식이라서 사랑하는 거지 성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애를 낳아보니 알게 되었다.
엄마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시골에 작은 방을 얻어 결혼생활을 시작한 엄마는 연달아 딸을 둘을 낳았다. 그때 나이 29살이었다. 그 시절엔 아들선호사상이 강했고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게 의무같이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둘째도 딸이라는 게 서운해서 와보지도 않으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싫어했다. 할머니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둘째를 딸을 가졌다고 해서 서운함을 표출한다는 게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 시절엔 그랬었다.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속상하고 힘들었을까 생각해 봤더니 그 어린 여인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다음 셋째를 가졌을 때 '그렇게 바로 임신하면 또 딸일 것'이라며 주변 사람들이 엄마에게 스트레스를 줬다고 한다. 어쩐지 엄마는 동생이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동생에게 고마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둘째 딸은 엄마한테 미안해서 그런지 낳을 때도 두 시간 만에 나왔어."
"안 낳았으면 어쩔뻔했어."
기억이 났을 시점부터 이런 말을 밥먹듯이 들었다. 나는 내가 원한 적도 없는 탄생을 한 것뿐인데 '미안해야 되는 사람'이었다. 그게 좀 이상했던 게 사실 나는 엄마한테 미안한 적이 없다. 그냥 태어나보니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고, 그저 관심이 있는 거라곤 먹고, 자고, 노는 것일 뿐인 아이였다. 언니와 남동생에겐 그런 말 자주 안 하는데, 나한테만 유독 안 낳았으면 어쩔뻔했냐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었다. 어릴 땐, 그 말을 내가 엄청나게 소중하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태어난 것 자체가 엄마에게 피해를 준 것만 같은 나의 무의식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기억이 떠오를 시점부터 나는 엄마가 힘들까 봐 걱정을 했다. 학교에서 준비물을 알려주면 엄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했다. 붕어빵이 먹고 싶어도 참았고, 소풍을 가야 해서 예쁜 옷이 필요하다는 말을 못 했다. 언니와 동생이 엄마한테 햄버거를 사달라고 말할 때마다 속으로 '엄마가 힘들지 않을까? ' 걱정을 하는 건 나뿐이었다. 태아 때부터 생각이 있었더라면 아마 그때부터 난 엄마의 걱정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 내가 너무나 가엾다. 사랑받는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제발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눈치 보고 사는 건 나의 생존전략이었고 당당하게 주장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게 편했다.
세상이 바뀌어 내가 딸 둘을 낳아도 이렇게 좋아하고 금메달이다 은메달이다 말들이 많지만, 엄마는 그렇게 힘든 출산을 세 번이나 겪고 나서야 집안에 할 일을 한 며느리가 되었다. 나는 요새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어떤 성별이 좋다 안 좋다 하는 것조차도 실례라고 생각하고, 뱃속에 아이의 성별이 뭐였으면 좋겠냐고 묻는 질문조차 불편하다.
우리 엄마는 참 이상하다. 육아휴직인 둘째 딸이 제일 힘들다고 하고, 맞벌이하면서 애 키우는 언니와 남동생에게 아무 말도 없다. 어린아이 둘을 키우지만, 직장생활을 안 하는 내가 어째서 가장 힘들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직장생활까지 하는 사람들이 더 쉴틈 없고 힘들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엄마의 말 뜻이 궁금하고 어쩔 땐 화도 났다. 엄마가 내가 사는 곳에 오시면 기차역까지 모시러 가겠다고 했더니 엄마가
"너 힘드니까 집에 있어라. 택시 타고 갈게."
하신다. 엄마가 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게 꼭 내가 사람들 눈치를 봤던 과거와 겹치며, 엄마 닮아서 내가 이렇게 사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다. 보고 자란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데, 내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당당한 사람으로 자랐겠느냔 말이다.
"엄마 그냥 좀 내가 데리러 간다고 하면 그래라 하면 안 돼? 왜 매번 거절인데? "
"너 힘들까 봐 그러지. 애 키우랴 집안일하랴 힘든데 왜 나까지 신경 써."
"나처럼 편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아무 걱정 없이 사는데. "
"그래도 택시 타는 게 편해."
이렇게 끝까지 엄마는 택시를 타고 오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끝까지 짜증을 내다가도 엄마 말에 따른다.
내가 우리 집에 엄마가 오면 밥과 커피를 사드리려고 해도 엄마는 기어코 금액을 물어보신 뒤 통장에 더 큰돈을 주신다.
"엄마가 돈만 많으면 둘째 딸 주고 싶다. 도움이 못돼서 미안해"
"엄마, 나 돈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그런 말을 해."
엄마는 대체 나에게 왜 그러시는 걸까? 뭐가 그렇게 맨날 미안하신 걸까? 어느 날은 동생이 그랬다고 한다.
"엄마는 작은 누나가 그렇게 힘들어 보여? 작은 누나만 힘들고 나는 안 힘들어 보여?"
라고 물어봤다고 하더라. 동생은 주말까지 쉴 틈 없이 일하고 대학원까지 다니며, 아들 둘을 돌보는 상황이라 서운했을 만하다.
엄마 이야기를 동네 언니한테 했더니
"엄마에게 혹시 네가 아픈 손가락이니?"
라고 나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에게 나는 아픈 손가락인 걸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왠지 맞는 말 같았다.
엄마는 한 인간을 키워내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해놓고도 마음속에 내내 뭐가 그렇게도 미안한지 그 딸에게 아무것도 받지도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하셨다. 그 마음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다니 나도 참 무심했다 싶었다. 나도 엄마한테는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사람들이 또 딸 낳았다고 비아냥거려도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럽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일 뿐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부족함 없이 주고만 싶은 그런 엄마의 마음을 왜곡하고, 미워하고, 오해해 왔다. 엄마가 나를 미워한다는 혼자만의 생각을 만들어내서 그 생각으로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엄마는 내가 아무 말 안 해도 내 표정만 봐도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다 알고 계셨다. '우리 딸 요새 많이 힘들구나' 하면서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지금도 나는 내가 아프고 힘들 때마다 시시콜콜 이야기해 왔다. 엄마의 걱정을 유발하여 관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나는 어릴 적 매일 아침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파왔던 그때의 모습에서 하나도 자란 게 없는 철부지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아직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엄마는 둘째 딸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많이 사랑하셔. 예전엔 엄마도 삼 남매 키우고 살아내느라 바빠서 표현이 서툴렀고,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잘 몰랐어. 네가 어릴 적 내내 눈치 보고 살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 이젠 더 이상 오해하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도 하면서 살아봐. 당당하게 살아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그리고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다. 네 마음 내가 다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