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미영 Oct 21. 2024

소못 소랑햄수다

정말 사랑합니다

 “소못 소랑햄수다.”


  동백나무 수목원인 카멜리아힐에서 장식용 족자에 쓰인 문구를 본다. 정말 사랑합니다, 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란다. 나는 곧장 동백나무 꽃말을 떠올려본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역시 필연성 높은 소품이군! 수목원 관리자가 숨겨 놓은 퀴즈를 나 혼자 맞힌 것처럼 나무 사이를 걷는 내내 뿌듯해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꽃향기를 따라 친구의 애틋했던 첫사랑이 떠올라 내 마음이 어지럽다.

 

  친구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그러나 상대는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사랑은 사치라고 했다. 그래도 친구는 멈추지 않고 가슴앓이를 했다. 슬픈 시만 골라 읽고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만 들었다. 떨어지는 꽃잎에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사랑을 떠올렸다. 


  어느 날, 가느다란 손가락을 잘근 씹으며 선운사 동백꽃을 봐야겠다고 했다. 발끝을 내려다보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무릎을 세우고는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친구의 작은 몸집 어디에 그토록 많은 눈물이 숨어 있었는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 큰 슬픔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시나브로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동백꽃이 질 때쯤, 친구는 다시 선운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저러다 자그만 몸이 형체도 없이 삭아 내릴 것만 같아 지켜보는 내가 조바심이 났다. 어쩌면 선운사에 가서 동백꽃을 실컷 보고 난 충족감으로 공허한 가슴을 가득 채우고 나면 힘든 사랑을 완벽하게 잊어버리지 않을까. 


  우리는 기어이 고창 선운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서 우리 둘은 침묵했다. 겨우 버티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힘들게 할 것 같아 어색한 분위기에도 참았다. 그 대신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송창식의 「선운사」에 몰입했다.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가던 길에 갑자기 비가 흩뿌렸다. 내리는 빗소리가 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꽃이 또 떨어지겠구나, 괜스레 안타까웠다. 맑은 날 붉게 벙근 꽃봉오리를 보는 것이 훨씬 좋을 텐데. 노랫말처럼 바람 불어 설운 것보다 비가 와서 더 설운 날이 되면 어쩌나 애가 탔다. 내 근심을 모르는 비바람이 가슴속을 휘휘 젓고 다녔다. 


  다행히 도착할 즈음에 비가 그쳤다. 멋스러운 선운산의 풍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선운사 입구에서부터 절 뒤쪽 산자락까지 삼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친구가 부디 동백나무 줄기 사이에 자신의 아픈 사랑을 내려놓고 마음이 홀가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친구는 꽃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해 찾아왔지만 막상 보려니 두렵단다. 한 자락 남아 있던 그리움이 바람에 낱낱이 흩날려 사라질까봐 무섭다고 했다. 친구의 몸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그리움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뭇가지에서 막 떨어지는 꽃송이가 있었다. 꽃의 추락이었다.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지 않고, 꽃봉오리째 툭 떨어져서 슬프게 느껴졌다. 내 눈에는 꽃이 질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장 화려할 때 떨어지는 것 같아 더욱 애절해 보였다. 


  친구의 사랑도 왠지 동백꽃을 닮은 듯했다. 피었다가 떨어지는 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간 첫사랑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 빛나게 푸르러야 할 사랑이 서서히 이울고 있었다. 

출처:네이버 영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에 고개를 든다. 문득 학창 시절에 보았던,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오른다. 원수지간인 두 집안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사랑하지만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나는 영화 줄거리에도 마음을 빼앗겼지만, 올리비아 핫세의 예쁘고 청순한 모습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러면서 훗날 나에게 다가올 사랑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꽃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생각해 본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듯, 기쁜 사랑이나 아픈 사랑을 경험한 후에 내적 성숙을 이루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라는 것을. 그러니 친구든, 가족이든,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아야겠다. 


  소.못.소.랑.햄.수.다.  

이전 08화 흔들리지 않아야 되는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