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전에 ‘달리기’는 없었다.
그 사연은 초등학교 1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친구들보다 좀 못 뛴다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괘념치 않고 있었다. 첫 운동회 날 모두가 참가하는 달리기 시합에서 나는 당근, 상을 받지 못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조용히 물으셨다.
“왜 달리지 않았니?”
“네? 달렸는데요?”
“내내 걸었잖아?”
“예?”
큰언니는 옆에서 킥킥 웃고 작은 언니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창피해서 혼났네.”
그런 일은 계속 되풀이되었다. 나는 노력해서 힘껏 뛰는데 다른 사람들은 걷는다고 생각하는 기이한 현상.
중학교 때 몸이 불면서 달리기가 더 힘들어졌다. 체육 시간에 1000 m 달리기를 하는 날이었다. 주류에서 멀어져 맨 꼴찌로 몇 바퀴를 홀로 뛰는데 허다한 애들이 나를 바라보며 응원을 하는 것이다. 못 본체 해주면 좋으련만. 남은 거리는 도대체 줄지 않고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 창피해서 괴로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등학교에서도 체육시간의 악몽은 계속되었다. 체력장 바닥 점수도 서러운데 매시간 체육 선생님께 뭔가가 찍혀서 야단맞는 일을 도맡았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가장 좋았던 일 중 한 가지는 체육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성인의 세계는 달리기 못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때는 조깅 인구도 별로 많지 않을 때다.
달리기가 안 되는 이유나 서러움을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큰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큰 아이는 작달막한 무 다리하며 발 모양이 나와 판박이다. 미국 외가를 방문 중 발을 다쳐 스포츠 크리닉 진찰을 받게 되었는데, 의사가 아이의 발모양을 보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볼록 올라온 거북이 형태의 발등을 가리키며 각도를 재가면서 얼마나 달리기에 불리할지, 달리기가 어려울지를 설명해 주었다. 겉으로는 아들을 염려하는 척 열심히 들었지만 맘속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위로를 퍼붓고 있었다.
‘다 이유가 있었네.’
두 아이를 수영으로 몰아가며 우리 가정에서 달리기를 퇴출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롱 다리에 아빠를 닮은 둘째가 학교에서 달리기 상을 솔솔 받아왔다. 고교 1학년 때 교내 1000미터 달리기에서 2등을 했는데, 시어머니는 자신도 초등 시절 달리기 상을 받았다며 흐뭇해했다.
막내의 달리기 사랑은 점점 싹을 키워갔다. 해병대에서 또 상을 받더니 아예 말년차 때는 마라토너가 되었다. 40킬로가 양에 안 찬다며 60킬로 이상의 울트라 마라톤을 시작했다. 자랑삼아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나이에 울트라는 무릎 손상의 지름길이다, 결혼하면 가정불화의 주범이다(주말마다 달린다며 나가니까)하며 말리라고 야단이었다.
어느 날 맛있는 것 먹으며, 적당히 뛰자고 타이르다가 본전도 못 찾고 도리어 훈계를 받았다.
“엄만 밑천도 하나도 없으면서 무슨…. 이거 저거 배운다고 돌아다니세요?”
변변한 체력도 없이 갱년기 하느라 헉헉거리며 학원에 다니는 엄마가 한심했나 보다.
"글 오래 쓰시려면 운동을 하셔야 해요!"
나의 글에 대한 로망을 간파하고 지혜로운 조언을 건네는 아들이 어른이고, 운동에 게으른 내가 자녀 같았다.
막내는 달리기 덕분에 전공도 바꾸며 자신의 길을 찾았고, 달리기 전도사가 되고, 해마다 어려운 산악 마라톤(trail running)에 참가했다. 늘 자기 계발에 뛰어난 남편은 잽싸게 하프 마라톤까지 도전하며 아들의 예뻐함을 받았지만.
나는?
달릴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있으므로 꿈쩍도 안 했다. 태생이 사전에 ‘달리기’란 없는 사람이고, 무릎은 삐익 상했다고 신호를 보내며 나이를 상기시켰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 제프 정 작가님이 발행한 글 <나는 왜 달리지 않지?>가 삐리리 눈에 들어왔다. 음악 전문이신데 웬 달리기를?
일상으로 달리는 평범한 러너의 입장에서 누군가 주저하는 이들이 있다면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마음속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다음 편에 계속>
대문 사진: Julien Opie <Dance 3 Figure 1 Step 2> 서울 키아프 전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