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
4. 앙상블을 시작하다
앙상블로 연주해 보는 것이 꿈이었던 터라 스즈끼 3권이 끝나자 주변에서 열심히 동지들을 모았다. 여러 악기와 함께 할 때 첼로 파트는 멜로디보다는 베이스 부분 반주 역할이라 악보가 과히 어렵지 않다. 또한 잘하는 멤버의 소리에 묻어갈 수 있으므로 실력이 약해도 가능하다. 배운 지 4년이 돼 가는 해에 첫 앙상블 모임이 있었다. 홍대 부근의 작은 연주 홀에서 선생님 세 분을 포함 15명이 모였다. 바이올린, 첼로, 플롯, 클라리넷, 피아노의 편성이었다. 함께 연주하니 각 악기의 음색이 어우러지고 화음을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으나, 한편 박자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베사메무초>, <스카보루의 추억> 등 외국 민요와 경음악부터 시작했다. 우리가 듣기에도 소리가 어설펐지만 모두들 마음이 설레었다. 모임 2년째 되던 해에 유럽에서 공부하신 지휘자 선생님과, 젊어서부터 악기를 배운 비올라와 첼로 주자가 들어왔다. 수준 높은 이분들 덕분에 앙상블의 품위가 조금 올라갔다. 내 소리는 온전치 않고, 선생님 소리에 묻어 간신히 악보를 따라갔지만 나름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앙상블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니 멤버들 중에서 발표회에 대한 욕구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연습했던 기량을 선보이며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겸, 신입을 모집하는 홍보도 될 겸 발표회를 하기로 했다. 삼익 아트홀에서 열린 우리 앙상블 첫 연주회 이름은 ‘제1회 따뜻한 음악회’였다.
성악가 한분, 장애인 아티스트 두 분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으로 짜서 맨 마지막 순서로 우리 앙상블이 연주했다. 레퍼토리는 <곧 오소서 임마누엘>, <주님께 영광>의 찬송가 두곡, <로미오와 줄리엣>, <침침체리>, <인생의 회전목마> 등의 영화음악, <라데츠키 행진곡>, 성악과 함께한 <솔베이지 노래>였다.
첫 무대에서 우리 모두는 꽁꽁 얼어 본래 실력을 백 퍼센트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OST의 낭만적 선율과 솔베이지의 메조소프라노 협연에서 중간중간 짜릿함을 느꼈다. 조금 될까 말까 하던 비브라토는 어림도 없었고, 라데츠키의 빠른 부분은 따라가지 못해서 활 긋는 흉내만 냈다. 구경 왔던 친구는 멋진 연주였다고 한껏 칭찬하더니, 얼굴이 너무 굳어 있었다고, 다음엔 표정을 좀 더 부드럽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고 싶지만 어느 세월에 그리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몇 년 전 첼로 연주의 꿈을 가슴에 묻어두라 했던 아들이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엄마가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신기해요!”
5. 십 년의 성적표
코로나 이전까지 모이던 앙상블 모임은 코로나 이후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몸이 건강할 때는 의욕을 갖고 첼로에 대한 목표를 세우다가도, 체력이 달릴 때는 금 새 회의에 빠지곤 한다.
‘이제 백세 시대라고 하니 손놀림 어둔한 것이 나이 탓인지, 연습 부족인지 한번 끝까지 가보자!’
‘아무리 해 보았자 결국 소꿉장난 수준일 텐데…. 이런 엉성한 연주가 의미 있는 것일까?’
이 두 가지 마음을 넘나들며 진도를 방해하는 집안 대소사들 틈새에서 아슬아슬하게 레슨을 이어가고 있다.
중반 이후부터는 학원 교습으로 바꾸었고 스즈끼는 6권 초반부에서 끝냈다. 16분 음표가 많은 빠른 곡이나 트릴이 잘 되지 않아서 스즈끼 진도를 나가기보다 좋아하는 명곡 위주로 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시리즈도 추천했는데, 어렵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사했다. (그런데 지난번 댓글에서 브런치 문우들이 1번을 좋아해서 프렐류드까지만 해보려 한다.) 요즈음 연습하는 곡들은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가브리엘 포레의 <꿈꾼 후>, 바흐 <G 선상의 아리아> 등이다. 올해부터 몇 친구들과 한 달에 한번 소품 트리오도 하고 있다. 초창기에 홀터의 책을 읽고 장차 그 아름다운 멘델스존이나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곡을 다룰 수 있으려나 했던 생각은 얼마나 가당치 않았는지? 감히 다다를 수 없는 하늘 같은 곡이다.
10년 이상 끌고 온 지금, 아마추어 수준으로 무난하게 명곡 한곡을 뽑기도 만만치 않다. 누가 물어오면 반으로 딱 잘라 오 년 정도 배웠다고 말하고 싶다. 악보 읽기는 어렵지 않은데 비브라토가 제자리걸음이라, 현(絃)의 풍성한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첼로를 배운다고 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던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연습량이 1만 시간 가까이 되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3천 시간에도 훨씬 못 미치니 정직한 결과일 것이다. 그나마 마지막 3년은 글 쓴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겨우 한 번밖에 잡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중년에 첼로 현을 켜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비록 곡은 매끄럽지 않더라도 몸이 건강하고 관절이 아프지 않고 여건이 허락한다는 의미이므로.
새해 소망은 학원 발표회에 참가해 보는 것이다. 나이 든 아줌마가 잘하지도 못하면서 솔로 무대에 선다는 것이 부끄러워 그동안은 늘 손사래를 쳤는데,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독주(獨奏)를 마치고 나면 실력이 한 단계 도약한다고 하니 한번 용기를 내봐야겠다. 요사이 초등생들은 공부 스케줄이 바빠 피아노나 첼로 연습할 시간을 잘 못 낸다고 한다. 이번엔 후중년 아줌마가 녀석들을 한번 이겨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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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의 그림 사진: 미셀 들라클루아 <구르네 성에서 부르는 캐럴> 2023년, 캔버스에 아크릴, 한가람 미술관 특별전/파리의 벨 에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