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대에 프랑스어 배우기
원래 가장 위험한 연적(戀敵)은 가까운 사람 가운데 있는 법이다. 프랑스어와의 만남을 방해한 녀석은 오랜 친구 영어였다. 아직 어설픈 우정이라 더 깊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로망의 새 언어 만나는 일을 망설여 왔다. 프랑스어 배우고 싶다는 의향에, 스페인어 교수인 친구도 좀 늦었다며 고개를 갸우뚱, 남편도 영어나 잘하시죠? 하는 반응을 보였다. ‘불 위의 여자’를* 겪고 나니 좀 뻔뻔해져서 영어 못하는 것을 괘념치 않게 되었다.
용기를 내어 회현동 A 불어 학원에 갔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이삼십 대였는데, 그들은 부모님 또래 급우를 보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기특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첫 수업 시간에 자기소개를 할 때였다. 앞줄의 젊은 급우가 이름을 말한 후에 스물두 살이라고 나이를 덧붙였다. (왜 꼭 나이까지 밝혀야 하는지?) 다음 차례들도 스무 살, 스물일곱 살이라고 또박또박 숫자를 밝혔다. (아마도 엉겁결에 따라 했겠지만.) 나는 어떡하나 하고 긴장이 되었다. 그때 내 앞에 앉은 여학생이 서른네 살이라며 쑥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냥 나이를 스킵해 버리지 않고.) 나도 대강 어물쩍 “오십이 넘었어요”라고 했는데, 오십(cinquante)이라는 숫자에 나뿐 아니라 급우들도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영어와 마찬가지로 R 발음이 힘들었다. 구강 깊은 곳에서 히읗처럼 소리내야한다. 동사변화는 무궁무진하고, 반과거 등 낯선 시제가 등장하고…. 엉과 아이의 중간쯤 되는 모음 발음도 쉽지 않았다. 단어가 깔끔하게 암기되지 않고 구름 속의 문자처럼 아스라이 맴도는 것도 문제였다. 관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작심 석 달이네 하고 놀려댈 주변 시선이 의식되어 그만둘 수가 없었다.
클래스메이트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이에 따라 5년 후 성적표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첫 수업에서 고2였던 학생은 점점 파리지앙처럼 발음하며 말하기 듣기가 승승장구하더니 DELF (프랑스어 공인 인증시험) C1까지 패스했다. 30대 때 시작한 급우들은 발음이 나랑 큰 차이가 없었다. 대부분 B2까지 땄는데 나만 A2 패스하고 더 이상 도전하지 않았다. 독해와 달리 말하기 듣기가 진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다. 공무원으로 플렉스 시험에 좋은 점수를 얻어 프랑스 연수에 뽑힌 이도 있다.
프랑스어를 3년 배우고 처음 파리에 갔을 때 몇 마디 해보고 싶었지만 실망스러웠다. 호텔 직원들은 나의 더듬거리는 불어에 불어로 응대해 줄 의향은 전혀 없어 보였고 빠르게 영어로 응수했다. (프랑스 사람들 영어 잘 못 한다는 것은 옛날이야기 같다. 시골지역에서만 그럴 것이다.) 택시 운전수 한분과 아주 간단한 대화를 했을 뿐이다.
수업 시간에 식당에서 주문하는 실전 상황을 여러 차례 배우고, 짝끼리도 해보고, 앞에 나와서 발표도 해보았건만.
파리 도착 다음날, 아침은 호텔 조식으로 하고 루브르에 갔을 때다. 원래 점심을 근처 식당에서 할 참이었는데, 박물관이 광활해서 몇 시간 누비고 나니 무척 배가 고팠다. 어디를 나설 힘이 없어서 비싸 보였지만 박물관 일층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우리 옆에 일본인 할머니 두 분이 자리했다. 그분들은 영어로도 불어로도 말할 의향은 전혀 없어 보였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눈짓과 손짓으로만 주문하고 있었다.
‘나는 기필코 프랑스어로 주문하리라.’
너무 분주한 곳이었고, 빨리 주문하라고 재촉한 남편 탓을 하고 싶다.
결국 나도 옆 테이블 분들과 큰 차이 없이 손짓 플러스 단어 몇 개로 주문을 마쳤다.
몇 년 후 프랑스에 또 갔지만 불어로 뾰족한 대화를 못해보기는 마찬가지다.
외국어는 아주 능통하든가 아니면, 감사합니다(Merci beaucoup) 죄송합니다(Excusez-moi) 저기요(S'il-vous-plaît)만 알면 되는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약 7년 정도 학원에 다니고 난 후의 성적표는 다음과 같다. 좀 부끄러운데 예습 복습을 건성으로 한 탓으로 돌리고 싶다.
읽기 영역에서
** 보들레르의 『악의 꽃』중에서 유명한 것 여러 편 읽음 (그중에서 <앨버트로스>와 <여행에로의 초대>등 몇 개는 외우고)
** 그 밖의 프랑스 시인의 유명한 시(詩)들 여러 개 : 랭보의 <취한 배> <모음들> 포함
** 생텍쥐베리 『어린 왕자』
** 까뮈의 『이방인』 1장
** <주기도문> 외움. 성경 <아가서> <시편> 50편까지, <신약> 일부분
** 현재 진행형으로는 좋아하는 성경 구절 만날 때 불어와 함께 보고, 프랑스 시(詩)를 가끔 읽는다.
말하기 듣기 영역에서
** 샹송의 가사들은 듬성듬성 단어들만 겨우 귀에 들어오고, 프랑스 드라마도 자막이 있어야 이해한다.
** 유튜브로 스몰토크 중심의 말하기 복습을 하고 있으나, 현지에 가면 위축되어 잘 안 나온다.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프랑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불어 잘하는 친구를 얻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업 중에 인생 2막의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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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라 드 리즈 지음, 문항심 옮김 『불 위의 여자』 은행나무, 2021년
대문의 그림 사진: 미셀 들라클루아 <불이 밝혀진 에펠탑> 1994년, Serigraph on paper, 한가람 미술관 특별전/파리의 벨 에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