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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닝페이퍼

by 손성유

컨닝 페이퍼가 들킨 날 내게 들었던 감정은 분명 절망이었다. 입을 꾹 닫고 있던 내게 왜 그랬느냐고 묻는 어른들의 성화는 내게 배신감을 불러일으켰고, 열 살짜리에겐 생소했던 그 감정은 당황이란 감정까지 끌어당겨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입을 닫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때 그 일은 삶은 언제나 우리를 배신한다는 인생의 커다란 명제의 어렴풋한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예고편 덕택에 내가 열다섯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스물다섯이 되기까지 그러한 삶의 배반성에 조금은 초연해졌느냐 하고 묻는다면 ‘전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누구에게나, 특히나 어른들에게 호감을 얻는 얼굴을 가졌으며, 활발하고 명랑한데다 공부까지 잘했던 나는 꽤나 의기양양한 열 살짜리였다. 매년 나의 생일파티에는 우리 반 여자아이들은 물론 옆 반, 옆옆 반, 심지어는 윗 학년의 아이들까지 오기 마련이었으며, 여덟 살이 되어 처음으로 시험이란 것을 본 이후로 나는 쭉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나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 애를 쓰지도 않았으며 일등을 하기 위해 기를 쓰고 공부해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것들은 그저 당연히 누리는 것들이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내가 컨닝 페이퍼를 만들었던 이유는 고마움, 내지는 부채감 때문이었다. 수학 시험지에 집중하던 와중 나는 내가 지우개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동시에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공포감을 안겨주었는데, 그 이유는 나도 왜인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3학년의 수학 시험지에 지우개를 꼭 써야할 정도로 복잡한 수식의 문제를 내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패닉 상태에 빠졌으며, 한참을 고민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의 앞에 앉은 여자아이에게 남는 지우개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시험 문제를 푸는 와중에 말을 거는 것이 짜증날 법 함에도 그 아이는 아주 상냥하게 자신의 지우개를 커터칼로 반을 갈라 나에게 건네주었고, 그 모습은 나로 하여금 커다란 감동에 휩싸이게 하였다.

빠른 속도로 시험지의 답을 채우고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아이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방안으로 연습장을 살짝 찢어 나의 답안을 다 옮겨 적은 뒤 그것을 그 아이에게 건넨 것이었다. 그것을 본 아이는 얼굴이 환해지더니 이내 상상치도 못하게 자신의 답안을 다 적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주고받는 우리의 얼굴은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 애틋함으로 너무나도 맑았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답을 하나로 맞춰나갔고, 이상하게도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신성한 행위인 양 느껴졌다.

일이 터진 것은 우리의 그런 ‘합일’의 과정을 본 원숭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한 남자아이가 시험이 끝난 쉬는 시간 쓰레기통을 뒤져 우리의 컨닝 페이퍼를 찾아낸 다음이었다. 그는 그것을 반 아이들에게 고래고래 소문을 내고 선생님에게 곧장 일러바쳤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곧바로 나와 그 여자아이를 불러 세웠다.

엄한 표정으로 왜 그랬느냐며 다그치는 선생님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항상 상냥한 목소리로 칭찬 스티커를 붙여주던 선생님을 나는 너무나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한순간에 나에 대한 태도를 돌변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익숙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나에게 항상 호의적이었고 나는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했다. 그랬기에 선생님의 처음 보는 목소리와 표정은 나에게 배신감과 당황스러움을 함께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평소에는 당돌할 정도로 말이 많던 나의 입을 꾹 다물도록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나에 대한 어른들의 더욱 많은 질문과 가십을 발생시켰다. 지금까지 1등을 한 것은 모두 컨닝 덕분이었다는 소문이 엄마들 사이에서 돌았고, 친구들을 데리러온 엄마들은 예전에는 없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 쯤은 모두 다 괜찮았다. 나는 어린 애였고, 엄마들 사이의 소문은 나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무서웠던 것은 이것들을 내가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황스러웠다. 그랬기에 나는 그 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됐던 선생님의 도대체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도 입을 열지 않았으며, 엄마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지내었다. 지우개를 매개로 했던 그 아이와 나의 짧은 우정은 깨어진지 오래였고, 우리는 주위를 의식하여 반에서 말을 섞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까, 학급 청소를 마치고 나온 나를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차림새가 기억이 난다. 무릎까지 오는 가죽으로 된 롱부츠와 어깨까지 오는 차분한 갈색 머리, 그리고 옆으로 잘 정돈된 깻잎 모양의 앞머리. 그리고 그와 어울리지 않는 조급한 두 눈동자.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

“안녕, 너가 희영이니?”

그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고, 그녀는 자신이 경은이의 엄마라고 소개하며 시간이 되면 얘기 좀 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나의 운명을 저주하며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숨긴 채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녀, 그러니까 그 아이, 아니, 경은이의 엄마가 나를 데려간 곳은 빈 교실도 운동장의 벤치도 아닌 우리 반 바로 옆의 계단이었다. 계단참에 그녀는 털썩 앉았고 나 역시 눈치를 보다 그녀의 조금 옆에 털썩 앉았다.

“경은이가 그러던데, 희영이 너가 먼저 컨닝 페이퍼를 줬다고.”

그녀는 급했다. 오늘 날씨가 좋지, 라든지, 오늘 급식은 뭐였니 라든지 하는 인사말은 생략한 채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웃기게도 나에게 꽂힌 것은 ‘경은이가 그러던데’하는 그녀가 서두로 덧붙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지독한 고독함이 나에게로 밀려들어왔는데, 그것은 얘도 엄마에게 말했구나, 나만 하지 못 했구나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희영이는 왜 경은이한테 컨닝 페이퍼를 준 거니?”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경은이의 엄마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도, 선생님에게도 하지 못한 대답을 처음 보는 아줌마에게 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것. 그것이 당시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답답해 죽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나를 쳐다보는 경은이 엄마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지금의 나도 조금 부담스럽다.

경은이 엄마는 결국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한 채 자리를 떠났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 아이 역시 4학년이 돼서 유학을 갔다. 그 사건이 그 아이의 유학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부채감을 갚으려고 한 일에 도리어 더욱 큰 부채감이 생겨버리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어쨌든 그 날 이후로 나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겉으로 보기엔 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나의 인생은 분명 하늘과 땅이 뒤집힌 만큼이나 달라졌다. 누군가는 이를 유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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