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행지에 가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지. 이것은 나의 여행 철칙이다. 여행지도 여행지지만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 처음 보는 음식이 있으면 꼭 사먹어봐야 작성이 풀린다.
중국 윈난(雲南)의 다리(大理)에 갔을 때다. 맛도 식감도 전혀 짐작이 가지않는 길거리음식에 꽂혀 기어코 하나 사먹었다. 비위에 맞지 않아 겨우 먹었다. 몇 년 뒤 TV를 보다가 그 음식이 '루샨(乳扇)'라는 발효 치즈 말린 것을 화덕에 구워 먹는 윈난의 별미란 걸 알았다. 다시 다리에 간다면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음식이다. 반면 입맛에 맞는 새로운 음식을 발견할 때도 많고 그러면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
세상은 넓고 먹을 것은 많다. 우리나라 땅도 안가본 곳만큼이나 안 먹어본 음식도 많다. 한달살기 여행도 석달 째다. 부산에서는 멸치찌개의 맛을 알았고 거제에서는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톳김밥을 재밌게 먹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처음 먹어본 음식은 뭘까? 그건 빙떡이다.
빙떡의 존재는 기왕에 알고 있었지만 짧은 일정에 일부러 찾아 사먹어보지는 못했다. 오일장에 가니 메밀로 만든 빙떡을 팔았다. 빙떡 가게가 눈에 띌 때마다 사먹어 보고 어떻게 만드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마치 '빙떡 마스터하기'가 이번 제주 여행의 테마라도 된 듯이...
메밀전을 얇게 부쳐서 무나물을 넣어 말아준다. 육지음식 메밀전병과 비슷하다. 메밀전병과 빙떡의 가장 큰 차이는 온도다. 빙떡 사면서 "방금 부친 거 뜨거운 걸로 주세요." 했더니 가게 주인의 대답, "뜨거우면 못 말아요. 원래 식혀서 먹어요." 라고 한다. 메밀전병은 물론 모든 부침류가 그렇듯 뜨겁게 나오는 음식인데 반해 빙떡은 메밀전 식힌 것에 식힌 무나물을 넣어 빙 말아서 먹는다. 메밀전병의 소는 신김치에 돼지고기 다진것과 으깬 두부를 쓰지만 빙떡은 무채 무친 것만 소로 넣는다.
사실 빙떡이 그렇게 맛있지는 않다. 좋게 표현해 담백하고 슴슴한 맛이지 사실 밍밍하고 '아무 맛도 안나는 맛'이다. 전병임에도 불구하고 부칠 때 기름을 극도로 적게 써서 고소한 기름 맛은 원천 차단된 음식이다.
제주 올레 길을 걷다가 메밀꽃을 많이 봤다. 지난 가을에도 메밀꽃을 봤는데 5월에도 메밀꽃이라니... 알고보니 제주에서는 메밀을 이모작하고 우리나라 메밀 생산 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거기에 제주 무가 또 유명하지 않은가. 즙 많고 달고 시원한 제주 무는 육지에서 특상품으로 대접받는다. 흰색과 연보라색 섞인 무꽃이 만발한 무밭은 눈부셨다. 4월 유채만큼 눈길을 끌지는 않지만 5월 무꽃도 모여있으니 예쁘다. 무꽃의 발견이다.
산방산 전경(前景)으로 메밀밭이...
무꽃 화사한 무밭.
메밀과 무가 흔한 제주에서 얇게 부친 메밀전에 무나물을 넣어 먹는 빙떡은 가장 제주스런 음식이다. 제사상에도 올리고 잔칫날 빠지면 안되는 음식이라고 한다.
구좌 하나로마트에 갔다가 제주산 100% 메밀가루를 팔길래 한 봉지 사왔다. 이제 무만 있으면 빙떡 재료 완비다. 무가 흔한 제주라 무 인심도 좋다. 숙소 주인이 무는 무제한 제공해주셨다. 빙떡 만들기 실전으로 들어간다.
[빙떡 만드는 법]
(1) 메밀가루에 소금을 약간 넣고 물을 부어 갠다.
(2) 식용유를 팬에 두르고 메밀전을 최대한 얇게 부친다.
이 때 무 단면에 기름을 발라 달군 팬에 살짝 문지르면 기름 양을 최소로 메밀전병을 부칠수 있다.
(3) 무는 채 썰어 소금과 물을 조금 넣고 삶아 낸 후 쪽파, 참기름(혹은 들기름)을 넣고 무쳐 둔다.
(4) 메밀전이 식으면 무나물을 넣고 김밥 말듯이 빙 말아준다.
막상 빙떡을 만들어보니 쉽지 않았다. 메밀 반죽의 농도를 맞추는 것과 메밀전을 얇게 부치기가 숙련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완성된 빙떡은 전병이 두꺼워 식감이 퍽퍽했지만 시장에서 사먹었던 것과 비슷한 맛은 났다. 문제는 심심하고 허전한 맛을 견디다 못해 '매운 고추 다대기 볶음'을 팍팍 뿌려 '퓨전'으로 먹었다는 것. 메밀밭과 무밭 사이를 누비고 다니다가 제주산 메밀과 무로 빙떡을 만들어먹으니 빙떡에서 제주의 흙 냄새와 바람 냄새가 났다. 우리가 먹는 것이 마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흙에서 노동에서 온다는 것이 한결 실감되었다.
메밀전이 두꺼워 통통한 빙떡이 완성됨. 무나물과 청량고추 다대기를 같이 넣어 매콤빙떡을 만들어 먹음.
제주 한달살기, 좋네. 장도 보고 주방도 이용하는 생활 여행의 특권을 맘껏 누려야지. 빙떡 외에도 '햇고사리들기름메밀국수'도 만들어먹었다. 햇고사리를 볶아 들기름메밀국수에 얹어 비벼먹는 '내맘대로 요리'인데 이름이 너무 기나? 무를 채썰어 생전처음 무전도 부쳐먹었다. 육지에서 먹는 늙은 호박전과 씹는 맛도 단맛도 비슷했다. 시장에서 사온 톳물김치에 자리돔을 뼈째 썰어 넣어 자리물회도 만들었다. 그러고보니 바다에서 주워온 보말로 보말미역국도 끓여 먹었네.
햇고사리들기름메밀국수, 자리물회, 무전, 갓주운 보말
빙떡을 만들면서 생각난 건데 제주에서 '제주의 맛 경험'을 팔면 어떨까? 이를테면 쿠킹클래스 같은 것 말이다. 제주 곳곳에 제주 감성을 파는 소품샵은 많던데 제주 음식 체험은 못본 것 같다. 제주 음식 문화 이야기를 곁들여서 빙떡도 만들어 먹고, 당근도 제주 특산이니 당근쥬스와 당근케잌 만들기를 같이 엮어 반나절짜리 원데이클래스를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