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보러 갔으나 바다는 그곳에 없었다!' 언젠가 대구의 쪽방촌 두 군데가 신문에 소개되어 주소를 메모해 두었다. 몇 달 뒤 그곳을 찾았을 땐 둘 다 아파트 공사장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마을이 사라지고 있다. 개인과 동네의 이야기를 품은 물성을 지닌 집이 사라지면 그곳에서의 삶과 시간도 덩달아 증발되지 않을까. 사라지기 전에 가 볼 요량으로 두 마을을 찾았다. 부산의 좌천동 매축지마을과 우암동 소막마을이다.
부산은 흔히 말하는 달동네가 많은 도시다. 산허리 비탈에 집을 지어 이룬 마을이라하여 부산에서는 '산복마을'이라 일컫는다. 청학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 호천마을과 안창마을 등이다. 남부민동, 감천동과 아미동에도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감천마을이다. 보수동 화재로 집단 이주한 태극도 신도들이 신앙촌을 형성해 살았던 마을로서 이미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들 동네 중 가장 강렬한인상을 받은곳은 아미동 비석마을이었다. 옛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장에 삶터를 일군 곳이다. 묘지의 비석이든 축대석이든 가리지 않고 가져와 집을 지어 비석마을이라고 한다.
공동묘지란 죽은 영혼이 떠도는 곳이라 으레 귀신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고 금기인 곳인데 그곳에조차 비를 긋고 바람을 막아 몸을 뉘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니 믿어지지않았다. 그런데 아미동 비석마을보다 더 열악한 주거지가 있었다.비록 평지이긴 하나 산복마을보다 나을 바 하나 없는, 바다를 메운 습한 땅에 들어선 매축지마을과 소막마을이다.
매축지마을
산복마을이 각자의 집을 판잣집이라도 얼기설기 만들어 살았던 단독주택 동네라면 매축지마을과 소막마을은 피난민들의 임시 집단수용소에서 유래되었다. 당연히 연립구조다.
매축지마을은 부산진 앞바다를 매립한 곳에 형성된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군용 말을관리하던 마구간과 마부와 짐꾼을 위한 막사가 있던 곳이 전쟁통에 오갈 데 없는 피란민들의 집이 되었다. 철길과 바다 사이에 고립되고 습한 지역이라 부산역에 가까웠음에도 외면받던 땅에, 절대 공간을 필요로 했던 이들이 인근의 부두 노역 등에 종사하며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일본식 주택 구조를 한 집들이 모여있는 매축지마을
매축지마을 매축지 시장 부근
매축지마을의 길은 매우 좁았다. 한 사람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 양쪽으로 수십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문만 열면 주방과 방으로 곧장 연결되는 구조의 비슷한 크기의 집들이 연립한 구조였다. 좁은 집에 두기 어려운 가재도구들이 집 앞에 나와있어 집과 집 사이의 골목을 지나는 동안 남의 집에 무단침입이라도 한 듯미안함이 들었다.
매축지마을의 좁은 골목
매축지마을의 중심에 화재를 알리는 매축지종이 있다.
집과 마을은 늙었고 그곳에 사는 사람 또한 늙었다. 빈집이 훨씬 많았다. 집 앞의 붉은 고무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좁은 골목을 다 차지하고 있다. 고무통의 정체는 뮐까? 물통? 젓갈통? 동네 할머니께 여쭤보니 연탄 통이란다. 아! 아직도 연탄을 쓰는 곳이 있었구나.
좁은 통로에 나앉은 붉은 연탄통
마을은 소멸되고 있다
우암동 소막마을
우암동과 감만동은 일제강점기 때 적기(赤崎아까사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적기교회 등 적기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곳은 일제 1909년부터 소 반출을 위해 위생검역소와 소막사 20곳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전국에서 온 소를 일본으로 실어 보내기 전 열흘 남짓 보관하던 소막과 검역소는 1950년 12월부터 피란민을 수용하게 된다. 1952년에는 적기 수용소에 1400가구, 6000여 명이 기거했고 피란민 규모가 최대였다고 한다.
소막사의 대들보를 기준으로 반으로 갈라서 칸막이를 해서 한 집당 4~5평으로 나눠 살기 시작한 것이 마을의 출발이었다. 당시 5평에 5~6명이 기거하며 부두 하역이나 목재공장 일을 했다. 1963년 적산불하정책에 따라 가구별로 필지를 불하받으면서 증·개축이 되기 시작해 지금의 구조가 되었다.
소막의 지붕과 환기구가 남아있는 집과 소막마을(국가등록문화재 715호) 조형물
마을 곳곳에서 소막의 지붕과 환기구를 찾아볼 수 있다
증·개축으로 변형되었지만 소막의 박공지붕의 절반과 환기구가 남아있다
소막 1개를 여러개로 쪼개어 살았던 흔적
위생검역소 자리는 헐렸고 공사 중이었다. 그래도 지붕에 환기통을 단 소축사를 쪼개어 여러 가구가 살았을 것으로 유추되는 단서는 좁은 골목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암동 소막마을 옛 지도(사진 출처 : 소막마을 주민공동체 센터)
도대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은 어디인가? 일제강점기부터 인구가 유입되던 부산은, 피란수도 시절에 이르자, 순식간에 과포화도시가 된다. 산비탈에도 살았고 공동묘지에도 살았다. 심지어 바다를 갓 메운 땅, 한때 마구간과 소막사였던 곳에도 살았다. 비바람만 피할 수 있다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은 없었다. 어디든 살아야 했다. 삶은 어디든 살아낸다.
절박했던 시절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임시 수용소 막사가 오늘날까지 누군가의 집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매축지마을은 언제 헐릴지 모른다. 예전부터 도심 속 가장 가난한 이들의 주거지로서 섬이나 다름없던 매축지마을은 이미 고층아파트에 포위당했다. 과거 이 마을이었던 곳의 일부가 초고층 아파트로 변했고 지금도 아파트 공사 중이다.
'극한 주거'의 모습을 맞닥뜨리고 보니 감히 외지인 주제에 개발이니 보존이니, 도시재생이니 뭐니 말 보태기가 외람되다. 어찌 되었든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거를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갈 거라 믿는다. 집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