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난생처음, 제주 올레길 걷기
퇴직 후 제주 여행을 두 차례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 걸으러 간다. 나도 걸으러 갔다. 3월 첫 여행 3일 내내 '걷고, 자고, 걷고, 자고, 걷고'를 반복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4월의 5일간의 여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좋았다. 오랜 친구라 함께라 더 좋았다. 우리가 제주에 있었던 3월에는 기간 내내 유난히 미세먼지가 심했다. 여행은 7할이 날씨인데 미세먼지가 1할을 깎아먹었다. 뿌연 하늘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완벽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나무에 갓 오르기 시작한 연한 새순 다칠세라 바람도 고이고이 불어줬다. 지천에 연둣빛 새싹이 올라오고 유채꽃이 만발했다. 푸른 바다와 검은 돌 사이에 흐드러져 핀 들꽃들도 제주의 아름다움을 협연하고 있었다.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제주를 만나다니 행운이었다.
제주에 몇 번이나 가봤지만 이제껏 올레길을 하나라도 완주해본 적이 없다. 인기 코스 한두 개를 산책 삼아 몇십 분 걸어본 게 전부였다. 반면에 친구는 걷기 여행으로 10여 개 코스 넘게 걸어봤다고 했다. 이번 걷기 여행의 가이드는 친구에게 넘겼다.
우리들의 제주 걷기 여행법은 이랬다(2박 3일 기준).
1) 첫날 : 각자 사는 도시를 출발해 제주 공항에서 오전 10시경에 만난다. 버스로 첫 코스로 이동 후 1코스를 걷는다. 1코스 종점 부근의 숙소에서 묵는다.
2) 2일 차 : 2코스를 걷고 종점 부근에서 묵는다.
3) 3일 차 : 3코스를 걷고 공항으로 간다. 저녁 비행기로 각자의 집으로 귀가한다.
이런 방법으로 3월엔 3일간 올레 3개 코스를, 4월엔 5일간 5개 코스를 걸었다. 두 번의 여행에서 올레길 1번에서 8번까지 걸었다. 올레길 걷기 하고 왔다고 하니 주변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라고 물었다. 내 발로 타박타박 밟아 걸은 올레길은 다 좋았다. "자식 중 누가 가장 예쁘냐"와 똑같은 질문이다. 그래도 집요하게 물으신다면? 첫 올레라 첫사랑인지 내겐 1코스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1코스는 그냥 1코스가 아니었다. 초입의 오름과, 이름도 예쁜 종달리 옛 소금반, 이끼 낀 돌 해변, 너른 바위 이끼 해변 광치기 해변, 그것도 모자라 코스 마무리 구간에서는 걷는 내내 성산 일출봉을 조망할 수 있다. 단연 1번이란 이름값을 했다.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올레 1코스로 갔다. 초입의 말미오름을 따라가다 보니 능선 숲길로 알오름으로 연결되었다. 말미오름은 초반부터 좀 가팔랐다. 오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약간의 등산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우리가 간 날, 알오름 전망은 망했다. 미세먼지가 원수였다.
오름에서 내려와 '종달이 바당길'을 걷다 보면 그동안 안보이던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목화 휴게소이다. 휴게소 앞 오징어 빨래가 펄럭였다. 위치가 올레길 1코스의 딱 중간 지점이니 목도 칼칼하고 쉬고 싶을 때 안주가 떡하니 눈앞에 어른거리는 꼴이다. 이 정도 유혹엔 넘어가 줘야 여행자의 풍류 아닌가!
제주 올레엔 '치맥' 대신 '오맥'이다. 이름이 휴게소이지 작은 구멍가게 안, 오징어 굽는 냄새와 연기 자욱한 곳에서 오징어 굽는 이모들의 손놀림이 바빴다. 다들 한 손엔 구운 '오징어 봉지', 다른 한 손에 '맥주 한 캔'씩 사들고 가게를 나와 바다 조망을 끼고 앉는다. 7천 원짜리 구운 오징어와 제주 바다를 안주로 맥주를 즐긴다. 땀 흘려 걸은 후의 오맥 한 캔은 '알쓰'인 나도 단숨에 맥주 한 캔을 비우게 했다. 나랑 같은 방법으로 제주 올레를 오맥과 함께 즐기는 뭇 올레꾼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동류의식에 취하니 오맥 맛이 더 짜릿했다. 올레꾼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오맥에 알딸딸한 걸음으로 걸어 내려오니 이끼 낀 돌 무지 해변과 존재감 작열의 성산일출봉이 맞아 주었다. '성산일출봉을 육지 쪽에서 조망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감상할 수 있는 코스'가 바로 올레 1코스이다. 게다가 입장료 안 내고 성산일출봉 자락을 돌아 나오는 코스까지 있으니, 선택은 걷는 자의 몫이다.
1코스의 하이라이트는 광치기 해변이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해변이 또 있었던가!' 너른 암반을 덮은 이끼 해변과 아스라이 뒷배경으로 살포시 얹은 성산일출봉까지, 원망스럽던 미세먼지 하늘이 몽환적 작품을 만들어냈다. 광치기 해변에 가는 이가 있다면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광치기 해변엔 빨간색 옷을 입고 가 주세요. 자기도 모르게 사진 모델로 데뷔하게 된답니다." 광치기 해변의 초록 이끼와 빨간색 옷 입은 사람은 더할 나위 없는 보색의 모델이 된다.
걷기는 친구의 말처럼 '몸을 혹사시켜 머리를 비우는 작업'이다. 걷고 또 걷고 하루 종일 걷다 보니 온갖 상념이 다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며칠간 아무것도 안 하고 걷고 쉬고 자고를 반복하니 단순해졌다. 자유로와졌다. 다들 이 맛에 제주에 걸으러 가나 보다.
올 한 해 달마다 며칠씩 제주에 걸으러 가기로 했다. 여행에서 헤어지기 전에 다음 달 항공편을 예약하고 다음 여행을 기약했다. 매달 2인분짜리 '월간 제주'를 발행하는 거다.
% 제주 올레길 걷기 여행 팁
- 올레길 걷기 정보 : 사단법인 제주 올레 홈페이지(www.jejuolle.org)
지도와 코스, 걷는 거리 정보가 상세히 나와있음.
- 올레길은 15킬로 내외가 대부분이나 숙소와 식당 오가기를 합치면 하루 20킬로는 걷게 된다.
- 숙소 정하기(1) : 매일 걷기를 종료한 지점 부근에서 자기-이 경우는 짐을 메고 다녀야 한다.
숙소 정하기(2) : 숙소를 한 곳으로 정하기-짐을 부려놓은 후 대중교통으로 코스별로 옮겨 다니며 걷을 수 있다.
** 우리는 (1)의 방법으로 했다. 동선과 시간 손실, 교통비가 적게 든다. 짐만 최소한으로 싸면 된다.
% 제주 걷기 현지 경비(항공권 제외)
: 2박 3일(2021.3월):2인 현지 총 경비 25만원-> 1인당 15만원(시내교통비 감안) -> 1인당 1일 5만원
4박 5일(2021.4월):2인 현지 총 경비 46만원->1인당 25만원(시내교통비 감안) -> 1인당 1일 5만원
** 결론적으로 항공을 제외한 현지 경비(숙박+식비+시내교통비)는 1인당 1일당 5만 원 정도 나왔다.
제주에서는 올레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돈을 안 써서. 나처럼 제주 가서 돈 안 쓰면 제주 관광 산업에 별로 보탬이 안된다. 어쩌다 보니 그 흔한 카페를 한번 안 갔네. 헐~ (여행자는 유흥 안 하고, 카페 안 가고, 택사 안타는 50대 아줌마 올레꾼 2명이었음.)
% 제주 걷기 여행 경비 표 참고(2인 기준)
2021.5.1_제주 올레엔 치맥 대신 오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