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의 생각들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준비하는 낙으로 살고 있는 요즘, 모스크바에서 볼 공연 하나를 예매했다. 마침 내가 모스크바에 있는 1월 중에 유리 바슈메트의 생일 기념 공연이 잡혀 있었다. 그의 공연은 예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시간이 흘렀음에도 종종 생각이 난다. 본 고장에서 만나게 된다니 기쁘다. 좋은 좌석은 아니지만 긴 여행에서는 공간을 경험하는데 의의를 둔다. 아니 그것 조차도 충분히 넘치는 호사라고 생각한다. 20181217
아직 귀국편 항공편 예매를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마일리지로 보너스 항공권을 사려고 하는데 여기서 또 고민 하나가 늘었다. 블라디에서 귀국하는 편은 15,000마일에 약 50불 정도의 세금을 내면 살 수가 있는데, 흔히들 말하는 편도 신공을 쓰면 <블라디보스톡 - 인천 / 인천 - 동북아 어느 도시>를 20,000마일에 약 90불 정도의 세금으로 살 수 있다. 사실 나는 마일리지가 거의 없는 편이다. 항상 그 때 그 때 저렴한 항공권 위주로 사다보니 아주 어중간하게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에 조금씩 있다. 내년이 되면 마일리지의 일부가 소멸되기도 하고, 그래서 대한항공의 마일리지를 쓰고자 하는데 이것도 참 고민이다. 맘 같아서는 발리로 가고 싶으나 그러기에는 약간의 마일리지가 모자라고, 그래서 삿포로로 정했는데, 또 가만히 생각하니 썩 땡기지가 않는다. 교토를 갈까? 한 일주일 정도? 그 외에 뭔가 좀 색다른 곳이 없을까? 사실 이 마일리지 안에서 움직여야 하니 그리 색다른 곳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조용조용히 걷다가 올까? 몇 월이 좋을까? 아. 쉽지 않다. 그런데 문득, 내년 연말 항공권까지 지금 사려고 하니 이 서글픔은 뭐지? 미리 두 살을 먹는 기분이다. 20181219
아이팟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채운다. 사계의 모든 곡들 중에서 가장 처음 빠지게 된 곡은 10월의 노래였는데 지금은 다시 1월의 노래에 빠져있다. 날씨 어플에 내리는 눈과 이 곡이 너무나도 잘 어우러져서 우두커니 날씨 어플을 켜놓고 있다. 이 겨울의 새벽에. 20181220
별일 없이 산 것 같은데도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해였다. 서촌을 떠나 남산 아래로 이사를 왔고 도서관을 옮겼으며 단골 과일가게가 생겼다. 그래도 여전히 집순이다. 촬영이 있거나 도서관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5월에는 할머니를 떠나 보냈다. 물론 슬펐지만 현충원 할아버지 곁에 잘 모실 수 있어서 감사했다. 여름에는 아빠를 도와 남쪽나라 시골집 공사를 하며 보냈다. 눈떠서 눈감을 때까지 육체노동. 나름대로 뿌듯한 작업이었다. 푸른 바다가 곁에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로였다. 어느 날에는 맥주 한 캔 챙겨가 파도 소리를 듣다가 왔다. 그 후에는 E와 함께 말레이시아로 휴가를 다녀왔다. 온전한 휴가는 아마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었던 여행이었다. 우린 거의 매일 물에서 놀고, 아름다운 숙소의 편한 침대에서 꿀잠을 잤으며, 맛있는 음식은 다 먹고 다녔다. 그러다가 멍청하게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쳤다. 일주일 뒤에는 아빠와 함께 엄마 대신 부부동반 일본 크루즈를 다녀왔다. 조금 웃긴 여행이었다. 가을에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겨울에는 런던과 광주에서 두 개의 전시를 했다. 20181223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오트밀에 두유, 바나나와 햄프시드, 피쉬 콜라겐을 넣은 오트밀죽을 아침으로 먹고 영양제 몇 알을 삼키고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넌다. 지난 번 맡긴 로모로 찍은 필름들이 모두 미노광이라 이번에 로모를 가져가기가 애매해졌다. 내 생각에는 배터리 접지 부분의 문제인 것 같다. 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했었기에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아예 안 나올 줄은 몰랐다. 일단은 면봉으로 접지 부분 청소를 하고 다시 가만히 놓아둔다. 서랍 속에 고이 모셔 놓았기 때문에 다른 이상이 있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당장 수리를 맡기기엔 부담이 된다. 디지털 카메라에 쓸 배터리도 하나 더 사야 하고, 은근하게 필요한 준비물들이 생긴다. 만일을 대비하여 일회용 카메라를 가져갈까 싶기도 하다. 가볍기도 하고. 일회용을 알아보다가 로모에서 나온 다회용 카메라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게 더 가성비가 높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 아직 미결정. 20181225
오늘 아침에는 따뜻하게 데운 두유 한 잔에 구운 계란 한 알과 구운 통밀빵 두 조각. 한 조각에는 피넛버터를 한 조각에는 갈릭치즈를 발랐다. 윈난성 홍차도 한 잔 마셨다. 물론 그 전에 유산균도 한 알 먹었고. 원래라면 바나나를 넣은 오트밀죽이 나의 정식 아침 식사지만 어젯밤에 마지막 바나나를 다 먹어버린 관계로.
크리스마스는 조용히 지나갔다. 꼬맹이 시절 이후로는 큰 감흥이 없는 날이다. 동생이 놀러 오기로 했다가 급체해서 못 오는 바람에 사놓은 음식들을 혼자 먹어야 했다.
연말에는 마치 의식처럼 기부를 한다. 열두 곳을 골라 조금씩 마음을 보탰다. 20181226
피부과를 다녀왔다. 약값만 무려 38,000원이었는데 귀 뒷부분 알러지 때문에 의료보험 처리되는 처방전을 받아서 약과 연고 모두 7,800원에 가능했다. 약국에서 만난 앞 사람은 안과 환자인 듯 했는데 그녀의 약값이 38,000원이었고, 그 다음에 내 차례가 되어 “얼마에요?” 하고 물었을 때 약사는 또 38,000원이라고 대답했다. 뭔가 조금 의심쩍긴 했지만 뭐.
버스 안에서 본 말라버린 단풍나무 이파리 색깔이 너무 예뻤다. 창백한 푸른 보랏빛이었는데 신비로웠다. 20181227
가져갈 신발을 고민한다. 영하 30도의 날씨, 눈길과 빙판을 견딜 만한 신발. 사야 하나 싶다가도 우선은 신발장을 먼저 살펴본다. 가기 전부터 지출이 상당하기에 절제가 필요하다. 예전에 사서 한두 번 밖에 신지 않은 미국 브랜드의 등산화가 보인다. 꽤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게다가 젖었을 때 빨리 마르는 소재. 양털 깔창을 하나 넣고, 수면 양말을 신은 채로 발을 넣어본다. 의외로 따뜻하다. 이러면 양말을 두 개 신을 수도 있겠다. 합격. 다른 후보 하나는 몇 년 전 불가리아 여행 중에 산 양털 부츠. 바닥도 미끄럼 방지가 되어 있고, 안감도 양털로 되어 있으나 젖으면 큰 일. 그리고 사이즈가 크지 않아 두꺼운 양말을 신으면 발이 아프다. 일반적인 겨울 날씨라면 충분히 괜찮은 신발인데 혹한을 견디기에는 조금 아쉽다. 그리고 자주 신는 롱부츠. 이건 한국에서도 자주 신는 신발이고 원피스와 찰떡이니 공연장에 갈 때 신어야겠다. 아직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등산화와 블랙 롱부츠, 그리고 기차에서 신을 여름용 슬리퍼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결국 신발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혹한을 견딜 만한 털부츠를 새로 샀다. 물론 세일 제품으로.) 20181229
2018년의 마지막 날이다. 해가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중요한 것은 나의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2019년에도 그렇게 살 것이다. 큰 계획은 없다. 지금처럼 꾸준히 작업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더 건강해지기.
오늘 세상의 모든 음악 선곡들이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다. 감사! 20181231
새해를 맞았다. 새해라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하는 것.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그저 묵묵하게 나의 길을 가는 것. 때때로 주변을 살피며. 아빠는 남쪽 바다에서 해돋이 영상을 가족밴드에 올리셨고, 엄마도 덕담을 올려 주셨고,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셋째도 건강하자고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즐겁게 스트레스 받지 않으며 살자고. 뭐 그 정도만 지켜가도 훌륭하다. 나이가 들수록 정말 그렇다. 20190101
두고 갈 화분들이 걱정이다. 걱정은 애정이다. 20190102
오늘은 마일리지에 2만점에 세금 약 10만원 정도를 내고, 블라디-인천 / 인천-오사카 두 구간의 항공권을 샀다. 가게 된다면 교토를 돌아볼 것이다. 돌아오는 항공편은 그 때 가봐야 알 것 같다. (시국상 일본 여행은 가지 않았다)
떡볶이를 너무 많이 만들었더니 삼시세끼 떡볶이다. 사실은 간편한 단백질 섭취를 위해 맥반석 달걀을 두 판 샀는데 먹어도 먹어도 줄지를 않아서, 떡볶이에 15알을 넣었더랬다. 하루에 두 알 혹은 세 알을 먹는다해도 무려 5일이 걸리네. 남은 건 누굴 주고 가야할 것 같다.
이제 다음 주면 출국이다. 20인치 캐리어에 배낭 하나 메고 갈 예정인데 카메라들 때문에 너무 무겁다. 서로 다른 종류의 카메라는 서로 다른 종류의 충전기와 배터리를 필요로 하기에. 옷은 거의 안 들고 간다. 입고 가는 것 외에 위 아래 딱 한 벌 정도와 속옷. 그리고 노트북과 외장하드, 충전기, 마우스. 그리고 또 샤오미 충전기들. 충전의 노예. 충전 없이는 세상도 없는. 만일을 대비하여 다회용 필름 카메라를 샀고, 필름 4롤을 샀다. 20190107
며칠 전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다가 카카오톡으로 로그인을 하고 처음으로 인사를 남겼다. 내 몸의 70%는 물이지만 내 영혼의 70%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고. 그랬더니 전기현님께서 "j님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 주셨다. 사실 카톡 로그인 해서 글을 남긴 건 처음이라 내 이름이 그렇게 불릴 지는 불리기 전까지는 몰랐던 일이다. 이어서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러 간다는 얘기와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1월의 노래 '난롯가에서'를 신청했다. 다음 날, 여행자의 노트 코너에 그날의 11번째 곡으로 내가 신청한 곡이 나왔다. 그리고 그 곡에 앞서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 OST의 'Friendship'이라는 곡을 들려주셨다. 작가님의 센스! 사실 나는 세모음을 들을 때마다 자주 놀란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어떤 작가의 책을 읽었는데, 그 작가 얘기를 한다거나 러시아 여행을 앞두고 있는데 러시아 도시들에 대해 소개를 해 준다거나…… 그런 일들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서 한 때는 집에 도청 장치가 있나 싶기도 했었다. 20190108
오늘은 J 오라버니를 오랜만에 뵈었다. 연락은 하고 지냈지만 못 본 사이에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았다. 홍대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이런 저런 수다를 나누었다. 전시회 티켓도 주셨다. 중간에는 시간이 비어 몇 가지 필요한 여행용품들과 홍루이젠 샌드위치를 사고, 오후 늦게는 S와 함께 키스해링 전시를 보고 던킨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로의 작업에 대한 얘기. 그리고 동대문 뒷골목에서 굴국밥으로 저녁.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를 한 코스 일찍 내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남산타워까지 올라갔다가 또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왔다. 전시는 좋았다. 작가의 일생이 보였다. 평생의 작업을 한데 모았으니 어마어마한 양이다. 공간별 색다른 구성도 좋았고. 그 정도 규모의 전시를 할만큼 작품이 쌓이면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공감하는 메시지.
"무엇을 하고자 하더라도 단 하나의 비결은 자기 자신을 믿고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하지 마라." - 키스 해링, 마이클에게 보내는 편지 중
집순이가 아침부터 밤까지 돌아다녔더니 피곤하다. 중간에 건너뛴 영양제를 몰아서 먹는다. 20190109
매일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가물거린다. 그제는 충무로에 가서 주문한 액자 두 개를 찾고, 마침 사무실에 계신 코이사님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감사히 설 선물까지 챙겨 주셔서 양 손 무겁게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저녁에 콜렉터 분을 뵙고 직접 전달하기로 했으나 몸이 좋지 않으시다 하셔서 작업 마치고 돌아오면 그 때 뵙기로 했다. 집에 와서 보증서를 붙이고, 포장은 공기가 통하도록 느슨하게 풀어두었다. 노란 조명 아래 두니 왠지 더 운치가 있다. 어제는 S와 함께 서울역에서 전시 중인 '커피사회 Winter Coffee Club'을 보았다. 역사가 있는 건물은 아름답고, 전시 컨텐츠 또한 흥미로웠다. 그리고 메뉴팩트의 커피는 여전히 맛있었다. 전시가 끝나도 그 공간에서는 계속 커피 향기가 진동하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다시 서울로를 걸어 집 근처에서 얼마 전과 마찬가지로 알탕과 꼬막비빔밥을 먹고 안녕. 화분 몇 개를 목도리로 감싼다. 내가 없어도 부디 잘 지내고 있어 주기를. 20190111
여행자 보험을 들었고, 도착한 날 쓸 교통비와 유심 카드비 정도만 인터넷으로 환전 신청을 해 두었고, 머리카락을 잘랐고, 마지막으로 세탁기를 돌렸고, 아직 설거지가 남았고. 20190113
떠나는 날이다. 한동안 식물들을 돌볼 수 없기에 저면관수를 하고자 대야에 물을 담아 화분을 담갔다. 옷은 정말 별로 없는데 카메라와 충전기, 배터리, 노트북, 전자기기들 그리고 손난로의 무게가 상당하다.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홍삼 엑기스와 인삼과 대추 달인 물을 자주 챙겨 먹었고, 다행히 감기 한번 앓지 않고 떠나게 되었다. 부디 여행 중에도 아프지 않기를. 자. 가보자. 시베리아로. 2019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