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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Mayfeng Nov 16. 2019

가능성의 탐색

 






가능성의 탐색



사실, 다음 여행은 막연히 시칠리아 섬이기를 바랐다. 한 달 쯤 홀로 떠돌며 구석진 곳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지난 가을 내가 읽었던 책들은 <모파상의 시칠리아>, 아서 스탠리 리그스의 <시칠리아 풍경>, 귄터 엥글러의 <이탈리아 음악기행> 등으로 도서 검색창에 ‘시칠리아’를 넣으면 나오는 책들이었다. 욕망을 누그러뜨리는데는 책만한 게 없으니까. 아니, 누그러뜨린다기 보다 언젠가 다가올 여행을 준비하면서 더 가까이 몰래 몰래 다가가는 거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칠리아에서 한 달은 무리인 것 같았다. 장기 여행이 체질인 나에게는 1~2주의 여행은 온천에 가서 발만 담그고 오는 기분에 가깝다. 그래서 잠시 보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음에 품고 있는 도시 하나가 슬 떠오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다. 몇 해 전, 탈린에서 코펜하겐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머물렀었다. 이동하는 날들을 빼면 온전히 주어진 시간은 이틀이었는데, 겨울 궁전과 넵스키 대로, 숙소 주변을 돌아본 게 전부다. 그럼에도 처음 본 러시아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풍스러운 건물에 넘치는 예술품들에, ‘아, 이 세상에 파리 말고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내 방 창문으로는 모이카 운하와 성 이삭 광장이 보였다. 그 풍경 또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연상케 하는 낭만적인 인상이었다. 여행 후 한 음악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 했었다. 




여행은 늘 아쉬움을 남긴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 한 편 보지 못한 것과 넵스키 대로 18번지의 문학카페에 들르지 못한 것도 물론 아쉽지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이 아닌 '내일도 이곳에 있을 것'처럼 더 느긋하게 지내보는 것. 늦잠을 자고 일어나 근처 카페에서 원고 작업을 하고, 이름 없는 공원을 산책하거나 별로 유명하지 않은 갤러리에 가는...... 그런 일상적인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상트페테르부르크다. 혹독한 러시아의 추위와 함께.




아쉬움을 남겨 두었기 때문에, 나의 여행은 계속 되었던 것 같다. 그 다음 러시아 여행은 극동의 도시, 블라디보스톡이었다. 2017년 여름, 제주항공에서 블라디보스톡 첫 취항 기념으로 티켓을 풀었는데, 알고 들어간 것은 아니고 하노이가 그리워서 보러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티켓을 사게 되었다. 90,600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가격에! 그 날 저녁에는 뭐에 홀린 것처럼 원래 사려고 했던 하노이 항공권까지 사 버렸다. 그 또한 10만원대 초반의 아름다운 가격으로. 그래서 9월에는 다섯 번째인지 여섯 번째인지 모르는 하노이 여행을 했고, 11월에는 확실히 두 번째인 러시아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 두 번의 여행이 없었더라면 아마 이번 여행도 없었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만 푹 지내다 와야지 하던 생각은 어느새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타볼까 하는 상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중, 2018년 9월 26일자로 올라와 있는 조금 지난 월스트릿저널(WSJ)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에서 플라츠카르타platzkart─시베리아 횡단열차의 3등석─를 서서히 현대화 할 거라는 내용이었는데, 당장 내년부터라니 마음이 급해졌고, 이번 겨울을 놓치면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무분별한 현대화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은 현대화된 열차가 아니라 노스탤지어를 불러 일으키는 차라리 더 오래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미 경험한 러시아의 물가는 이 여행을 한 달 이상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게 했다. 이미 두 끝─러시아의 왼쪽 끝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이고, 오른쪽 끝은 블라디보스톡이다─을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여행이다. 그렇게 나의 시베리아 횡단 여행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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