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뚜렷한 경계가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5도를 넘었던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아침 산책길에 나서면 제법 선선한 기운이 공원을 감싼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잎도 조금씩 색깔을 바꿀 채비를 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의 시구처럼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려고' 한다
퇴직한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여름에서 가을로 다가서듯 어느 순간 성큼 시간이 흘렀다. 하루하루가 비교적 평온하게 흘러갔고 그렇게 쌓여 가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퇴직 이후의 시간은 어린 시절과 대비된다. 입학 전 어린 시절이나 퇴직 이후의 시간이나 큰 틀에서 보면 노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은 놀더라도 별다른 걱정은 없다. 그러나 퇴직 후는 놀며 시간을 보내기에는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들이 많다.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경제적인 문제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는 마당에 일거리는 없고 소득은 줄어든다. 경제적으로 생길 수 있는 공백을 메꿔야 하는 부담이 크다. 건강도 하루가 지날수록 나빠진다. 다리의 근력이 빠지고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 자식들의 미래에서도 자유롭기 힘들다. 취업, 결혼 등 당사자가 결정해야 할 일이지만 부모로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직장 다닐 때의 시간과 퇴직 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회사에서는 월요일 아침 회의를 하며 한주를 시작한다. 이런저런 잡무와 미팅을 하고, 사람을 만나다 보면 금세 금요일 오후가 된다. 그때도 시간은 참 빠르다 느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 하는 일도 없고 시간의 흐름을 촘촘히 느낄 수 있는 환경이지만 시간은 더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하루하루의 삶이 더 단조롭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루의 일상이 그냥 몇 개의 큰 덩어리로 나눠지고 반복된다. 뇌는 그것을 단순하게 분류한다.
앞으로 뭔가를 새롭게 결심하고 한다는 게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의 시간도 좋은 시간이다. 지나고 보면 더 그렇게 느낄 것이다. 지구는 태양을 돌며 해마다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라는 시공간 속에 나를 떠밀고 있다. 지금에 집중하며 인생의 좋은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행복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