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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Sep 28. 2017

겸손이 사람을 만든다

2017년 9월 28일, 아흔세 번째

소설 <1984>를 처음으로 읽었습니다. 그 동안 '전체주의'니 '빅 브라더'니 대강 주워들은 말로 떠들었던 걸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잘 모를 때야 이말 저말 지껄이기 쉬웠으나 막상 제대로 읽고 나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책이었습니다. 감시나 통제 따위의 주제보다 더욱 흥미로운 화두가 있었거든요. '존재'와 '시간' 그리고 '인간성'입니다. 하이데거가 책 제목으로도 낙점했듯, 존재는 시간과 밀접합니다(물론 다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고 다시 이야기 해보기로 하지요).

"내가 없어도 세상은 존재하는가?" '그렇다'고 답한다면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 진실과 거짓은 명확히 나뉩니다. 우리는 정신과 독립적인 세계를 기준으로 사실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도 정신과 무관하게 흐르므로 사실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세상을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같음과 틀림으로 나누는 사실판단에서 옳음과 그름으로 나누는 가치판단으로 이어질 때, 시간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이성이 세계의 존재성을 침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그때 사람은 '인간성'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지닙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앙가주망이 떠오르지요(<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정신 활동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버클리라는 학자의 생각을 배우면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이 당신의 뒤통수에서 순간순간 세상을 열심히 만들어내고 있다 해도, 당신은 그 말을 반박할 수 없다는 말. 원래부터 존재하는 세계는 사실 허구이며, 지금 내가 감각하는 세계는 사실 '지금' 있을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세상을 감각하지 못하면 세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내 정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이 내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모호해집니다. 과거와 미래도 '현재'가 지닌 절대성 앞에 굴복하고 맙니다. 가치판단은 의미를 잃습니다. '지금' '내게' 좋은 것이 '영원히'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유아론'이라 부릅니다. 쉽게 논박할 수는 없지만 끝까지 추론해 나가다보면 궤변으로 끝나고 마는 생각입니다. 유아론은 결국 인간성을 파괴하는 행위를 옹호합니다. 타인도 내 생각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는 칸트의 호소는 유명무실해지고 맙니다. 세상을 쥐고 흔드는 '나'는 언제나 최상의 목적이 되고, 나 아닌 모든 존재는 나를 위한 목적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1984>는 이 문제를 정확히 꼬집고 있습니다.

(악역이 주인공을 고문하며)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게. 지구의 나이는 우리와 같네. 우리보다 더 오래되지 않았단 말일세. 어떻게 더 오래될 수 있겠나? 인간의 의식을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이든 존재할 수 없네."
...(중략)
"물론 어떤 점에서는 그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네. 바다를 항해할 때나 일식을 예보할 때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별들이 수백억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게 편리하기도 하지. 하지만 도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자네는 천문학의 이원적 체계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나? 별들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가까이 있을 수도, 또 멀리 있을 수도 있는 걸세. 자네 혹시 '이중사고'란 말을 잊었나?"
...(중략)
"원스턴, 형이상학이 자네의 강점이 될 수 없다고 내가 말했었지. 자네가 지금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말은 유아론일 걸세. 하지만 자네는 착각을 하고 있네. 자네의 방식대로라면 집단적 유아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건 다른 것이네. 사실은 정반대이지. 자, 여담은 이쯤 해두세."
...
- 371-373쪽

집단적 유아론! <1984>에서 당이 행하는 모든 악행-감시, 통제, 고문-은 이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아론이 '내가' 곧 세계라는 생각이라면, 집단적 유아론은 '당이' 곧 세계라는 생각일 터입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판단의 기준은 당이 됩니다. 유아론이 그러하듯이 집단적 유아론도 논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혹시 자네 일기장에다 '나는 방법은 안다. 그러나 이유는 모른다.' 라고 쓴 거 기억나나? 자네가 자신의 정신 상태가 온전한지 의심하는 때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일세.
- 365쪽

"나는 방법은 안다. 그러나 이유는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당이 인간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이런 통치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 생각이 잘못되었는지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이 감각을 떠나서 세상을 경험하기 어렵듯이, 주인공은 당을 떠나서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당이 저지르는 악행에 반발심을 갖게 된 것도 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노동자 마을을 경험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적입니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도덕과 윤리를 아우르는 말일 것입니다. 사실 소설 속 당의 목적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당원으로 하여금 세계의 존재성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완벽한 정신상태를 갖도록 유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당의 통제를 거부합니다. 완벽한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니 자연히 "자신의 정신상태가 온전한지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인공이 몰랐던 "왜"입니다.

교만한 사람에게서 느끼는 분노는 다분히 감정적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실은 교만한 이들이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유아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감각을 떠나서는 세상을 경험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세상의 기원을 감각에 두는 일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네 손가락이 달을 만들었구나!" 하고 놀라는 꼴이랄까요. 그런데 딱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세상은 하루하루 각박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오지랖은 좁아지고 제 코가 석 자인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겠죠. 존재와 시간, 인간성이 춤추는 <1984>를 읽으면서 도덕과 윤리의 기원은 겸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낮은 사람인 듯합니다. 겸손하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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