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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Sep 26. 2022

우리가 사는 세계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4

티 내지 않은 일은 세계에서 사라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드러난 것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합리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엄연히 내가 한 일인데 드러내지 않으면 사라질 수도 있다니?


아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드러내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다. 아무도 몰라줘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고독한 내가 한 일은 세상을 바꾼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사과를 먹으면 사과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걸 나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사과가 사라졌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사과가 놓여 있던 세상과 사과가 내 뱃속으로 들어간 세상은 결코 같은 세상이 아니다. 인식되지 않는다고 존재까지 위협하는 건 불합리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홀로 있는 방에서 사과를 먹었다면, 사물의 세계에서 사과는 사라진 것이다. 사과는 형태를 잃고 분해되어 내 몸의 일부가 된다. 그건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사과는 사라졌다. 일도 마찬가지다. 일꾼의 입이 아무리 무거워도 일꾼이 한 일이 사라지는 건 말이 안 된다. 말꾼이 아무리 자기 성과로 포장하려 한들, 일꾼이 한 일은 일꾼의 성과다. 그건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바로 사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서로 다르다고 말이다. 사물의 세계에서는 사과가 사라졌더라도 인간의 세계에서는 사과가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물의 세계에서는 일꾼이 한 일의 흔적이 남아있더라도 인간의 세계에서는 까맣게 사라졌을 수 있다.


아무래도 영 어색하다. 세계면 세계지, 사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라니? 세계가 여러 개라도 된다는 말인가? 맞다. 나는 인간이 삼중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지금 세계가 여러 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세계는 자연, 사물 세계, 인간 세계다. 각각의 세계에는 서로 다른 사실들이 있다. 세 가지 세계의 특징이나 자연과 사물 세계 사이의 관계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세계가 여러 개일 수 있는지부터 따져 보자.


세계는 여러 개일 수 있을까? 당연히 나의 세계는 단 하나다. 내가 여러 명이 아니라 단 한 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언어생활에 녹아들어 있다. 세계(世界)는 불교에서 비롯된 낱말로,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에서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전에는 세간(世間)이라는 말을 썼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세는 과거-현재-미래를 의미하고 사람은 그 사이에서 탐욕에 빠져 괴로워한다. 불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가 그러한 욕심을 버리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을 구하는 건 부처가 된 이후의 문제다. 내가 부처가 되기 전까지 세계는 내가 욕심을 갖거나 욕심을 버려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나만의 세계가 된다.


세계라는 낱말에 국가적인 의미가 끼어들어가기 시작한 모습은 서재필이 지은 독립신문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 1권 30호에서는 윤동선이라는 사람이 신문사에 보낸 편지가 소개된다. 편지의 내용은, 나라를 태평하게 만들고 국민을 평안하게 만들기 위해 병력을 기르고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편지에서 윤동선은 높은 사람부터 머리를 자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 따르게 하면 3년 안에 문명세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용하는 문명세계라는 낱말은 일본을 포함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계는 한 국가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문화적인 수준을 가리킨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불교적 의미의 세계와는 사뭇 다르지만, 내가 경험하는 총체를 세계라 부른다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윤동선의 세계도 역시 단 하나의 세계를 의미한다.


세계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생각에 어색함을 느끼는 건 비단 우리말에 담긴 의미 때문만이 아니다. 1985년 미국 가수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자고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문제의식은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왜 다르게 사느냐는 것이다. 세계(world)는 유일한 신의 창조물이다. 다 같은 신의 자녀들인데 다르게 사는 건 부당하다. 우주(universe)도 마찬가지다. 삼라만상이 기거하는 집을 뜻하는 영어 낱말은 유니버스(universe)다. 유니버스는 전체, 모든 것을 가리키는 라틴어 우니베르수스(universus)에서 비롯됐는데, 우니베르수스는 하나(ūnus)로 돈(versus) 것이라는 뜻을 지닌 합성어다. 영어문화권에서 세계는 단 하나라는 생각이 이미 녹아들어 있다. 어느덧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된 영어문화권에서 세계는 단수로 전제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일견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내게 보이는 세상은 단 하나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세계는 드러난 것들로 구성된다. 나에게 드러난 것들, 다시 말해 내가 있다고 믿는 것들이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다. 내 세계의 한계는 내가 믿는 것들의 한계다. 드러난 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뜻한다. 느낌도 결국은 믿음의 한 모습이므로, 우리에게 드러난 것은 곧 우리가 믿는 것이다. 감각, 꿈, 느낌, 신앙, 소망, 사랑은 믿음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면 그것은 있다. 있는 것들을 모두 모으면 세계가 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우리에게 드러난 것들의 총합이다.


만약 온 세상에 나 혼자밖에 살고 있지 않다면 세계는 내게 드러난 것들로만 구성될 것이다. 표류자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그의 믿음이 곧 섬이고 세계다. 그가 아무도 없다고 믿으면, 그리고 그 믿음이 틀렸음을 말해주는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곳은 무인도가 된다. 그가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 그 발자국이 식인종의 것이라고 믿으면, 그리고 아무도 없으면, 그것은 식인종의 발자국이 된다. 먼 훗날 또 다른 표류자 프라이데이를 만날 때까지 그 믿음은 공고했다. 세상에 인간이 나 하나뿐이라면, 내게 드러난 것이 뒤바뀌거나 사라지거나, 드러나지 않던 것이 새로 드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함께 살아서 인간이다. 로빈슨 크루소에게도 결국에는 프라이데이가 나타났듯이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다.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면, 다른 모든 것들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결국 상상일 뿐이다. 그런 상상은 틀렸음을 지적하는 인간이 언제나 곁에 있다.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에게 동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안하무인 격으로 사는 사람은 다른 인간에게 혼나야 한다. 인간은 언제나 단수(singular)가 아니라 복수(plural)로 산다. 단수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늘 복수형임을 드러내는 인간이 곁에 있다.


그러므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내게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드러난 것이어야 한다. 단수인 내가 아니라 복수인 우리에게 드러난 것이 세계를 이룬다. 단지 내가 있다고 믿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다는 확신이 내게 들 때, 비로소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그렇게 때문에 있는 것은 있는 것임과 동시에 있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지금 내게 드러난 그것이 정말 있는 것인가? 그렇다. 수많은 너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들에게도 그것이 현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는다. 고로 그것은 존재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사과가 놓인 방에 다시 가보자. 그곳에는 나와 사과 둘뿐이다. 만약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또 거기 있었다면, 그리고 내가 사과를 먹을 때 그가 내 곁에 있었다면, 내가 사과를 먹은 일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고독한 나의 사과는 이제 함께하는 우리의 사과가 됐다. 그 사과의 존재에 대해 나 혼자 왈가왈부하는 건 소용이 없다. 우리가 그 사과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그 사과가 우리에게 드러났는지가 중요하다. 일꾼과 말꾼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일꾼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봤다면 그 일은 비밀이 아니다. 아무리 말꾼이 성과를 가로채려 한다 하더라도, 일꾼이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을 본 다른 인간이 있는 한, 일꾼이 한 일을 일꾼에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것이 내게 드러났다고 다른 이에게 시인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간의 세계다. 인간의 세계는 함께 사는 세계, 정치적인 세계다. 정치적인 세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드러난 것을 공유하며 확인하고 인정하는 세계다. 사과 하나가 놓여 있더라도 사과라는 사물 그 자체가 세계를 이루는 게 아니라 “내게 사과가 보인다”는 말이 세계의 기초를 놓는 것이다. “너에게도 그러냐”는 말이 세계를 확장하며, “내게도 보인다”는 말이 세계를 구성한다.


직장인의 철학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화 일꾼과 말꾼

2화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들에게

3화 드러난 것이 있는 것이다

4화 우리가 사는 세계(방금 읽은 글)

5화 사내정치를 위한 변명

6화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정치인이다

7화 보이지 않아 사라지는 것들

8화 가장 어두운 범죄

9화 있어 보이는 비밀

이전 03화 드러난 것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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