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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Sep 29. 2022

사내정치를 위한 변명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5

우리는  내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세계, 인간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 그런 세계에서 일꾼과 말꾼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부분은 인간의 세계가  정치적인 세계라는 점이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정치인이어야 한다. 우리가 활동하는 장소가 회사 안일지라도 말이다.


인간은 홀로 살지 못한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날 때부터 두 개의 세계 속에 살아간다. 부모의 양육이 절실한 까닭이다. 부모는 갓난아이에게 젖과 옷, 집을 주면서 아기를 기른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에게 의식주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전달한다. 부모가 믿는 모든 것들은 아이에게 전해진다. 그러한 믿음은 대체로 금지의 형태로 전달된다. 예를 들면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이라든지, 가서는 안 될 곳, 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동을 배우면서 아이는 부모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부모가 정한 금기는 아이의 세계에 경계를 짓는다. 아이는 그 경계를 넘어보기도, 순응하기도 하면서 부모의 반응을 살핀다.


아이가 말을 배우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시점부터 아기는 끊임없이 ’왜’를 묻기도 한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이의 세계를 감싸던 경계, 부모가 설정한 바로 그 경계를 움직인다. 부모의 설명을 듣고 나름대로 생각해보면서 아이는 자신의 경계를 바깥으로, 안으로 옮긴다. 요동치는 경계 속에서 아이는 부모의 금기를 어기지 않고서도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알지 못한 세계를 탐구하면서 자신의 경계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또래 친구들과 묻고 답하고,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면서부터 아이는 부모가 답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경계를 확장한다.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는 부모가 정한 몇 가지 금기가 부당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부모의 말에 순응하던 아이는 이제 반대하기를 서슴지 않고 때로는 반항을 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이의 인격이 부모 앞에 드러난 것이다. 인간의 인격은 자기 나름의 의견이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날 때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사물이 있다는 사실도 그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의견으로 밝혀진다. 각자의 세계에서 그것이 드러났다며 다른 인간에게 확인을 구하고 인정하는 과정, 다시 말해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곧 존재 그 자체다. 아이의 인격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는 부모의 세계에서 살지 않겠다, 나의 세계는 그 누구의 의견이 아니라 나의 의견으로 구성된다는 아이의 모습에 부모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이 아이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순간이다. 아이는 이제 남 앞에서도 자기 나름의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나름의 이유로 자기 앞에 드러난 모든 것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아이를 낳아 부모가 한 것과 같은 과정을 겪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한 낱말로 압축하면, 그것은 바로 정치다.


정치라는 낱말은 썩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종종 거짓, 사기, 협잡, 배신, 선동, 모략, 모순 등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라는 말을 이렇게 역겨운 의미로 쓰는 이유는 거짓말쟁이, 사기꾼, 협잡꾼, 배신자, 선동가, 모략가, 모순가들에 의해 오염된 때문이다.


정치는 여러 사람들의 세계 사이에서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동료 인간과 말과 몸짓을 통해 교류할 때 인간의 세계에는 경계가 지어지고 움직인다. 정치로 인해 우리는 사물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나의 세계 안에 드러난 사물이 너의 세계 안에서도 드러났다고 확인 받음으로써 사물의 존재가 확고해지기 때문이다. 인정이 존재에 앞선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 신뢰를 얻는다. 그 신뢰는 세계에 대한 신뢰다.


정치를 통해 확실해지는 것은 사물의 존재만이 아니다. 정치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동료 인간에게 드러내는 유일한 길이다. 행위하는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인정받기 때문이다. 부모 밑에서 아이는 두 번 태어나는데, 첫 번째 탄생은 엄마의 몸에서 분리되어 홀로 생명을 유지할 때이고 두 번째 탄생은 부모와 다른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이다. 아이가 새로운 친구와 선생을 만날 때 아기는 언제나 정치적 관점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정치적 탄생은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한 계속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함께 사는 인간에게 더는 드러내지 않게 된 순간, 인간은 죽는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서 사람은 계속 숨이 붙어있을지 몰라도, 조온 폴리티콘(ζῷον πολίτικον)으로서 인간은 죽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라틴어, 조온 폴리티콘은 ‘폴리스스러운 동물’이라는 고대 그리스어다.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가리키는 낱말인데, 인간이 함께 사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했다. 고독의 반대가 곧 폴리스였다. 그러니 ‘폴리스스럽다’는 말은 함께 산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시간이 흘러 폴리스는 정치라는 개념을 가리키게 됐다. 그래서 조온 폴리티콘은 폴리티컬 리빙 비잉(political living being), 즉 정치적으로 살아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때 폴리스는 요즈음 우리가 쓰는 왜곡된 정치 개념과는 달리 그저 함께 사는 삶을 의미한다. 행위로 서로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며 살 때 비로소 사람은 인간이 된다.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끝낼 때 인간의 삶도 끝난다. 그때 끝나는 삶은 정치적 삶이다.


타인의 시야 안에 나 자신을 드러내면 나는 살고, 사라지면 죽는다. 오랜 여행을 떠나 아예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동일하다. 우리는 연락도 닿기 어려울 만큼 멀리 떠난 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은 친구를 두고 그저 그가 멀리 여행을 떠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타인의 행위가 내게 드러나지 않으면 그는 죽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것도 결국은 드러냄의 연속이다. 인간의 삶은 드러냄이다. 인간은 동료 인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며 산다. 그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사람은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던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어떤 말도, 몸짓도 하지 않는 사람, 속마음처럼 비밀스러운 사람, 영원히 생각 속으로 침잠하는 사람, 다른 인간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는 그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없다.


일꾼과 말꾼 이야기는 일하기와 말하기의 갈등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일만 하면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정치적인 세계에서 말 없는 일꾼은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다. 마치 청첩장을 받지 못한 결혼식에 참석하기 매우 불편한 것처럼, 동료 인간이 내게 드러내지 않은 행위는 알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가 때로 아니꼬워하는 말꾼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거나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다.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 그가 원하는 걸 그에게 줄 권한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꾼의 존재가 가장 빛나 보이는 것이다. 말꾼의 행위가 사물 세계의 사실에 부합하든 어떻든 일단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꾼의 존재가 가장 명확하다. 평가권자가 어떤 기준으로 다른 이의 존재를 인정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성실함을 좋아하는 사람, 진실됨을 좋아하는 사람, 아부를 좋아하는 사람, 자신의 말에 다른 이들이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있다. 말꾼은 그 세계를 보고 그에 맞게 행위한 인간이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두고  '정치질 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 표현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묘사하기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직장인의 철학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화 일꾼과 말꾼

2화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들에게

3화 드러난 것이 있는 것이다

4화 우리가 사는 세계

5화 사내정치를 위한 변명(방금 읽은 글)

6화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정치인이다

7화 보이지 않아 사라지는 것들

8화 가장 어두운 범죄

9화 있어 보이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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