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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wa Lee Nov 17. 2019

청혼보다 권투연습

남자는 청혼의 무대에서 권투연습을 한다.

산책을 시작하는 곳에는 ‘청혼의 벽’ 이라는 장소가 있다. 청계천에는 사람들이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종종 구간 마다 콘셉트가 있는데, 그중 이곳은 프로포즈를 위한 장소로 꾸며진 것이다. 청혼의 벽에는 남자가 무릎꿇고 반지를 건네는 그림이 하트 안에 그려져있고, 주변에 하트 모양 철제 의자가 드문 드문 놓여있다. 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옆면에는 어둑해지면 하트 모양 라이트에 불빛이 들어오도록 꾸며져있다. 그야말로 하트 일색이다. 그뿐이 아니다. 천변에는 나무데크로 무대가 꾸며져있다. 꼭, 이곳에서 청혼을 하라는 듯이말이다. 지금은 무심히 지나가게 되었지만, 모두들 이곳 풍경에 적응하던 봄 무렵에는 식사를 마치고 다리 위를 지나가며 누군가 한마디씩을 던지고는 했다.


"이런데서 정말 프로포즈를 할까?"


너 같으면 어떨 것 같아? 라는 물음에 이제까지의 대답은 “정말 싫어!” 가 압도적이었다. 나 역시 “정말 싫어!” 중 한명인데, 청혼의 벽 부근은 회사와 철공소, 주거지가 모여있는 그야말로 로맨스라고는 끼어들기 어려운 일상의 현장들이다. 사랑을 맹세하는데 주민과 회사원들이 기웃기웃 하고, 하물며 그 구경거리의 주인공이 내가 되는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낯뜨겁다.하트 일색으로 꾸며진 풍경이 너무도 직설적이라 자뭇 촌스러운 것도 물론이라, 내가 만약이라도 이곳에서 프로포즈를 받게된다면 있다면 진지하게 그가 나와 맞는 사람인지 미감을 재점검하게 될 것같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를 결정짓는 둘만의 중요한 약속은 역시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끼어들 수 있는 장소보다는 애정과 따듯함이 담긴 둘만의 장소에서 하는 것이 좋지않을까, 하는 생각.


기세를 몰아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들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청혼의 구간을 초록으로 물들여갈 무렵,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청혼의 무대에서 누군가 열심히 스텝을 밟고 있었다. 아리송한 그의 몸짓은 자세히 보아하니 앞 뒤로 오가며 가드를 올리고 훅을 날리는 폼이 권투 연습 중인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의 흘끗대는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 그의 폼이 느리지만 자뭇 신중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남자는 청혼의 무대에서 권투연습을 한다. 나는 매번 앉는 그늘아래 벤치에 앉아 본의 아니게 그의 솔로 권투를 구경한다. 꾸준히 매일 천천히 느는 그의 실력을 구경하면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내게 된다. 어쩌면 아무도 프로포즈 하지 않을지 모르는 무대이겠지만, 아무렴. 당분간 이곳은 청혼보다는 권투의 무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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