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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Aug 27. 2023

더러운 강이군 그래도 아름다워

  삶이라는 밭에 사랑을 심는 것 같지만, 어쩌면 사랑이라는 밭에 삶을 심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먹고 자란 삶을 먹는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에 나오는 아사코의 이름은 아침의 ‘아사’를 쓴다. 우연히 만난 남자 바쿠는 보리라고 쓰고 바쿠라고 읽는다. 나중에 만난 남자 료헤이는 사케 회사에서 일한다. 늘어놓고 보니 딱히 어떠한 은유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만 이것이 땅의 이야기였고 사랑이라는 밭에 삶을 심는, 아니 삶을 한 번 심어보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땅과 사랑의 위기는 어디일까. 흔들릴 때다. 아사코는 갑자기 바쿠를 만났고 사랑하게 된다. 바쿠가 갑자기 사라진 뒤 다시 나타났을 때 큰 혼란을 겪는다. 접시가 깨지고 몸을 웅크리게 된다. 어쩌면 바쿠가 지진 그 자체의 은유인 듯 접시와 마음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뿌리가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일구어 갈 수 있나, 영화는 그냥 열심히 일단 한 번 해본다. 천재지변을 예측할 수 없듯. 일단 한 번 열심히 실수를 만회해 본다. 료헤이의 직장동료는 아사코의 친구에게 심한 말을 하게 된다.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그런 상황에서 일단 한 번 돌이켜 본다. 열심히 사과해 본다. 상황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우리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면 삶도 흔들린다. 영화 초반 라디오에선 지진에 관한 뉴스가 작게 흐르고 있고 영화 중반 거대한 지진이 도심에 일어난다. 결국 교통은 엉망이 되고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겁에 질려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릴 때 이사와 전학을 자주 다녔다. 몇 번은 잘 적응한 것 같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의식적으로 마음의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까지 흘렀구나.” 생각해 보니 그다지 열심히 한 것 같지 않은데, 어쨌든 시간은 지났고 상황도 변했고 나는 자랐다. 열심히 라는 건 한 1분 정도 힘껏 달리고 1분 정도 내 마음을 전하는 일인 것 같다.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지만, 보통 여기까지만 해도 좋다.

  천재지변은 또 찾아와 모든 뿌리를 끊고 힘껏 만든 지금을 슬픈 어제로 만든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고 ‘그래도’ 아름답다. 아사코는 점점 힘을 낸다. 힘든 상황을 겪는 친구 앞에서 자신을 위해 울만큼 솔직해진다.

  “더러운 강이군.”, “그래도, 아름다워.” 다른 두 사람의 말이다. 영화를 다 보면 한 문장으로 읽힌다. 이사와 전학의 고통은 점점 무감해졌다.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버렸다. 어느날 어머니가 내 발목을 가만히 잡아주었을 때, 가방에서 나온 건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내 손에 없는 것들. 그때쯤 마음을 얻었다.

  내가 두려워한 건 천재지변이 아니라 뿌리 내리는 삶 자체였던 것 같다. 다음 같은 건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아사코가 다시 료헤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자라있었다. 돌이킬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모습이었다. 사랑을 먹고 자란 삶을 잔뜩 먹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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