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
이 나무의 이름을 모르겠다. '식물 하는 사람이 척 보면 알아야 하지 않나?' 하고 물으신다면, 제주에 사는 남부 수종들이야 모를 리 없지만, 우물 안에서는 아무리 오래되어도 고인 물일 수밖에 없다고 답하겠다. 잎새라도 있으면 식물 찾기 앱을 뒤져서 이내 찾아낼 텐데 아직 눈 내리는 겨울이니 수피만으로 알 수가 없다. 수피가 골진 모양이 녹나무를 닮긴 했으나 낙엽수와 상록활엽수의 간극은 너무도 크다. 복원되었거나 새로 쌓은(성벽은 아닌) 담장이다. 담에 바짝 붙어 자랐으니 수령 짐작이 어려울 만큼 거목이라 해도 조선시대 나무는 아닐 것이다. 궁 안에는 보안상의 문제로 왕조시대에는 나무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담에 붙여 심은 나무라면 조경설계자의 특이한 취향이었을 것이다. 씨가 날려 자랐을까. 아무튼 협소한 축대 위, 담장 곁에 바짝 붙어 자라는 이름모를 나무는 뿌리가 노출되어 축대를 감싸 안고 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뿌리가 흘러내리는 거목과 비교할 만큼은 아니지만 나무의 긍정과 생존의 의지는 감탄할만하다. 수고는 10m를 넘어 보인다. 나무의 수형과 크기는 뿌리와 비슷하다. 극히 일부만 보이는 뿌리는 땅속으로 얼마나 광대하게 뻗고 있을지 짐작케 한다.
시선을 밖으로 돌려 현실의 불만족을 남 탓, 환경 탓, 구조 탓으로 돌리면 원망과 분노의 노예가 된다. 이런 생각은 파괴적이다. 나무는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다. 싹트고 뿌리내린 곳을 불평하는 대신 조금 더 불리할 뿐이라 생각했다.
불리하다고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 조건이 나무를 더 빛나게 할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