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소유했던 동남아시아인 노예들

조선이 가졌던 동남아시아인 노예들 "토인(土人)"의 정체란 무엇인가?

by 바다의 지정학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어마어마한 장면이 하나 나온다.


바로 "흑인" 노예를 태조 이성계가 소유하는 장면이다.


정확히는 섬라곡국(暹羅斛國)이라는 당시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태조에게 바쳤던 노예인데, 이 노예가 마치 "흑인"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세계 패권국으로 저 멀리 아프리카 대륙의 케냐까지 진출한 명나라의 정화의 대함대라면 모를까, 조선의 국력으로는 아프리카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오늘은 조선시대 태조가 소유했다는 이 "흑인 노예"에 대한 역사를 설명하려고 한다.












(1)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소유했던 흑인 노예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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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393년(태조 2년) 6월 16일, 조선왕조 태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등장한다.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그 수하 내(乃)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군왕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귀족의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섬라곡국이란? 중국어로 "셴뤄후"는 태국인 샴(Siam)을 뜻하는데 이 중국어 발음의 영향을 받은 조선은 태국을 뜻하는 국명을 사용할 때는 한자식으로 섬라곡(暹羅斛)으로 쓰게 되어 이후 태국을 뜻하는 국명은 "섬라곡국"이라 했고, 포르투갈 왕국 역시도 이 중국어 발음의 영향을 받아 태국을 "시암"이라 부르게 됐다. 이외에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동남아시아 국명들 중에 꽤 많은 국명들이 중국인 한족에 의해 정해진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동남아시아 "참파 왕국"의 경우도 원래는 "챔파"에 가까웠는데 중국 한족들이 "참파(占城)"라고 문헌에 기록하는 바람에 "참파(Champa)"라는 영어 명칭으로 공식화되어 버린다.


어쨌든, 동남아시아의 태국에 있었던 "아유타야 왕국"을 뜻하는데 이 아유타야 왕국은 국력은 매우 약한 주제에 수명은 무려 1351년에서 1767년까지 416년이나 살았던 왕국이었다.


이 아유타야 왕국을 장악했던 "장사도(張思道)"라는 범상치 않은 위인이 조선 군왕에게 어느 날 갑자기 여러 헌상품들을 바치면서 "토인(土人)"도 바친 것이다. 장사도(張思道)라는 한족식 이름을 보면 아무래도 이 위인은 시암 왕실에 소속되어 있지만 중국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중국 한족 상인이거나, 한족 해적이거나, 화교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근세시대의 동남아시아 바다는 명나라 한족 해적들과 혹은 한족 상인, 일본 해적들이 패권을 장악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당시 장사도 일행은 소목 1천 근과 속향 1천 근처럼 조선에서 매우 귀한 물품들을 바쳤는데, 조선은 역시 기록에 미친 국가답게 모든 품목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리고 함께 바친 것이 바로 토인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토인이라고도 하고 "흑인"이라고도 써있고, 또 흑인처럼 설명해 놨다. 그래서 한동안 학계는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그리고 여러 사료들을 철저하게 교차검증한 끝에 이들은 바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는 아닌 저 멀리 해양부(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인 "인도네시아인"이거나 "말레이시아인"으로 추정된다. 흑인이라고 적혀 있는 건 비교적 하얀 피부 색깔을 가진 조선인들에 비해 인도네시아인이나 말레이시아인은 까만 피부였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한 듯 하다.


후기 때 조선인 문순득이 필리핀으로 탐험(이라고 쓰고 표류라고 읽는다)을 갔을 때 만났던 필리핀인들을 죄다 까만 피부의 흑인처럼 묘사하여 기록한 것만 봐도 당시 조선인들은 하얀 피부인 조선인들과는 정반대로, 까만 피부인 동남아시아인들을 완전히 오늘날의 아프리카 흑인처럼 바라봤던 것 같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처음 보는 동남아시아의 태국인들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는 장면들이 많다. 고려시대인들이나 조선시대인들은 금욕주의가 매우 강하기도 했고, 지리적으로도 중국 북부나 한반도는 워낙 세계적으로도 혹한으로 추운 시베리아 기후를 가졌기 때문에 고대 중국 한족들이나 중앙아시아의 몽골-튀르크인들, 고려시대인~조선시대인들이 항상 옷을 꽁꽁 싸매고 다녔던게 기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적인 혹한으로 추운 시베리아 기후 탓에 항상 옷을 여러 겹씩 꽁꽁 싸매고 다녔던 중앙아시아인들이나 동북아시아인들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저 멀리 남쪽의 동남아시아인들은 웃통을 벗었고 어떤 이들은 맨발이 많았던 것이다. 이게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높은 사람은 흰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싸맸고, 그 복종(僕從)은 존장(尊長)을 보면 옷을 벗어 몸을 드러냈는데, 세 번 통역을 거쳐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금욕주의를 가장 미덕으로 여기며 성을 억압하고 절제하고 탄압하고 억압하며 금욕과 검소, 절제를 가장 삶의 근본으로 삼는 유교 성리학 사회에서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시대인들이나 조선시대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천하게 여겼고, (조선인들이 보기에)미개한 동남아시아인들과는 별로 교역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당시 태조는 이 흑인(토인)들을 예조(禮曹)의 명에 따라 왕궁 의전 행렬(班列)에 참가시켜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았다. 그 후 그 흑인들을 귀족의 대궐 문을 지키는 데 쓰게 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 같다. 하지만 이후 흑인(토인)들은 다시는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해 기록이 없다. 아무래도 그저 동남아시아인 노예일 뿐이라 별로 관심도 없었고, 다시는 기록이 없던 걸 보면 아마도 그들이 원래의 고향으로 영영 돌아가지는 못했던 듯 하다.










(2) "상국" 조선의 동남아시아인 노예 무역



이 모든 이야기들은 태국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조선에만 기록되어 있다. 아무래도 동남아시아보다 조선이 문명국이기도 하고, 또 당시 전근대시대까지 외교나 무역은 지금처럼 동등한 위치에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국력의 차이에 따라서 높고 낮음이 확실했던 것도 있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조선을 "상국"으로 떠받들었던 것도 있었다.


"진언상(陳彥祥)"이라는 14세기 후엽 ~ 15세기 초엽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했던 화교 상인 출신의 외교관이 있는데, 그는 "장사도(張思道)"를 필두로 한 노예 상단의 외교관으로 따라온 것이다. 그의 글에서 보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조선을 "상국"으로 떠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아유타야 국왕은 "상국"인 조선의 군왕에게 계속 선물을 보내고 싶어했는데, 임득장(林得章)을 단장으로 하는 회례사(回禮使)를 보냈지만, 이들은 나주시 앞바다를 점령하던 왜구 해적단을 만나 대부분 학살당하거나, 일본으로 납치되어 버렸다. 조선 정부도 회례사로 태국에 사신으로 예빈 소경 배후(裵厚)를 보냈는데, 그들도 왜구 해적단들을 만나 모두 죽고, 간신히 통사 이자영만이 살아남아 탈출해 귀국했다.


태국으로 귀환한 진언상은 10년 뒤, 이번엔 1406년 8월경에 자바섬으로 진출하여 조와국의 노예 무역 사절이 되어 현지인 121명들을 이끌고 조선에 무역을 하러 온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군산 앞바다를 점령한 왜구 해적단들이 15척의 전함들을 이끌고 나타나 진언상의 무역선들을 기습공격하였고, 현지인 승조원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 20명이 전사하고 60명은 납치당해 왜구들의 전쟁포로나 노예로 끌려 갔으며, 단 40명 만이 살아서 조선으로 간신히 도망쳤다. 가장 암울한 것은 팔러 온 물건들은 죄다 왜구들이 약탈해 빼앗아 갔으며, 값비싸 보이는 옷까지도 죄다 빼앗아 가서 거지꼴이었다고 한다.


호되게 데었기 때문일까, 이후로 조선의 앞바다를 찾는 무역선들은 더 이상 없었다. 운 나쁘게 표류했던 네덜란드 하멜 정도였을 뿐이지... 그 외에는 스페인 왕국 교역선이든, 동남아시아 교역선이든, 포르투갈 왕국 교역선이든 그 누구도 조선과 교역하러 앞바다에 얼씬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면 악명 높은 왜구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기에 왜구들이 무서워서 감히 조선의 앞바다에는 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곳을 지나가면 왜구들에게 기습공격을 받아 학살을 당했기에 조선 앞바다는 국제적인 죽음의 장소였던 것이다.


















(3) 근대시대의 동남아시아 이슬람계 수적 이란눈, 발랑기니 노예선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먼 조선까지 노예로 끌려 왔을까?


이에 대해 알아보려면 동남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던 노예 무역에 대해 알아봐야 된다.




1.jpg 근대시대 18~19세기의 동남아시아 이슬람계 수적 이란눈(Iranun), 발랑기니(Balangingi) 노예선의 활동 경로


이 그림은 근대시대인 18~19세기 동남아시아 이슬람계 수적들인 이란눈(Iranun), 발랑기니(Balangingi) 노예선의 주요 활동 경로를 그린 그림이다. 동남아시아의 주요 대표 종교하면 "이슬람교"였기 때문에 이슬람계 수적들은 해양부(도서부) 동남아 일대들을 쑥대밭으로 이슬람교인들이 아닌 현지 원주민들을 집단 납치해 노예로 삼았는데, 특히 이슬람계 수적들의 주 먹잇감은 바로 가장 약소국이었던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은 스페인 왕국의 속지였기 때문에 가장 약소국이었던 점도 있었고, 스페인 왕국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오합지졸로 전락했기 때문에 미국이 툭하고 건들면 망할 정도로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자기 몸뚱이 하나 지키기도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필리핀 총독은 필리핀 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이슬람계 해적들이 스페인인들만은 노예로 납치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해적들의 주 먹잇감은 도서부(해양부) 동남아시아 열대 섬들인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주로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인 베트남,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에는 해적들이 거의 진입하지 못했다. 왜 일까? 바로 국력 차이다. 지금이야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인도네시아가 잘 살지만, 전근대 시대까지 동남아시아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비롯한 국력이 가장 강했던 국가들은 죄다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었다.


고대 중국의 한족 제국들이 항상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고 식민지배(대표적 예: 베트남)하면서 그 과정에서 고대 중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기술력이 조금이나마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에 흘러들어간 것이다. 이는 마치 영국이 미국을 속국으로 삼았으나 그 과정에서 영국의 경제력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면서 미국의 경제력이 발달하여 끝끝내 미국이 스페인 왕국을 박살내 오합지졸로 만든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해양부 동남아시아 지역들은 상대적으로 고대 중국의 대륙제국들과 너무 멀리 떨어진 남쪽에 위치해 있었고, 게다가 해양부 동남아시아 지역들은 너무 습하고 무더운 고온 다습의 열대 섬이었기에 말라리아 모기들이나 뎅기열 전염병들도 심했고 거대한 비단뱀들이나 악어 같은 열대 지방의 동물들이 정글에 숨어 있었고,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기에 개척하기도 힘들고, 이런 여러 가지 종합해서 식민 지배하여 주둔하기도 힘든 지역들이었다. 그렇기에 고대 중국의 한족 제국들은 해양부 동남아시아 지역들은 관찰하고 "기록"은 해놨으나 사실상 버려둔 채 방치했다. 그리고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그대로 실크로드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으나, 해양부 동남아시아 지역들은 그마저도 못 받았으니 해양부 동남아시아 지역들은 마치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처럼 고립된 구석기 사회로 정체됐었다. 예를 들면 16세기까지도 잉카인들이나 아즈텍인들처럼 거의 알몸으로 생활하던 필리핀 원주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찌됐든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계 수적단(예: 이란눈, 발랑기니, 이슬람 술탄국의 민병들)들은 동남아시아의 해양 패권을 장악한 중국 한족 해적들이나 일본 해적들, 오스만 해적, 인도 해적, 서아시아 이란 해적, 중동 아랍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말레이, 보르네오, 필리핀 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수많은 필리핀 원주민들을 노예로 사로잡았다. 예를 들어 1770~1870년 사이 이란눈, 발랑기니 노예선이 술루 술탄국으로 옮겨 보낸 필리핀 원주민, 스페인인 노예들이 20만~30만 명에 이른다는 연구가 있다. 동남아 수적의 피해로 “수백 명의 필리핀인 원주민 여자들이나 스페인 기독교인 여자들이 노예로 끌려가야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처럼 동남아 각국 해적들은 대규모 인신매매, 노예교역망을 만들었으며, 그 시장은 인도양, 중동 및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4) 필리핀 원주민 노예 시장





동남아 노예 시장은 광범위했고, 공급자, 수요자도 다양했다. 공급 측면에서는 중국 한족 출신의 노예 무역상과 한족 해적, 서아시아 이란 상인, 일본 왜구, 중동 아랍 상인, 현지 동남아시아 이슬람 상인, 인도 상인, 포르투갈 상인 등이 주로 필리핀 원주민들을 노예로 납치, 매입했다. 예를 들면 중국의 한족 해적들이나 노예 무역상, 일본 왜구들은 워낙 해군력이 세계적으로 막강해서인지 대륙부 동남아시아까지 침공하여 동남아시아인들을 납치하여 전쟁 포로나 노예로 많이 끌고 갔고, 포르투갈 왕국의 해군들은 말라까에서 말레이, 자바 등지의 노예를 사고팔았다. 수요 측면에서는 베트남, 아유타야(태국) 왕국, 아쩨 술탄국, 말레이 등 인근 동남아 왕국들이 필리핀 원주민 노예 노동력들을 필요로 했고, 중국 귀족들이나 서아시아의 이란 상인, 오스만 제국 상인, 인도나 중동 아라비아 상인들도 동남아시아 원주민 노예 확보에 혈안이었다. 당시 조공, 무역 대상이 된 태국 왕실 역시 향약(香藥) 제조용 노동력 확보를 위해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체적 동남아시아의 노예 시장으로는 술루 술탄국, 말라카(말레이), 수바니(인도네시아), 만델링카(아체 술탄국), 마닐라(스페인령 필리핀) 등이 손꼽힌다. 술루 술탄국은 특히 18~19세기 수적이 잡아온 필리핀 원주민 노예들을 대규모로 재분배했으며, 이란, 중동, 인도의 남아시아, 오스만 제국 노예교역망과도 연계되어 있었다. 신기한 점은 포르투갈 왕국을 비롯한 유럽 왕국들이 중국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많이 판매했다는 점이다. 당시 중국 귀족들이 포르투갈 왕국이나 스페인 왕국에게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대량으로 많이 요구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남부에서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비롯한 노예 매매 기록들이 매우 많다.













(5) 조선의 동남아, 아프리카인 노예 무역



앞서 기술한 것처럼 중국 명나라 한족 해적단들과 노예 무역선들, 오스만 제국의 교역 상인, 이란의 노예선, 중동 아랍의 무역상, 인도의 무역선, 일본 왜구,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술루 술탄국의 노예선들이 가장 강력하게 필리핀 원주민들을 노예로 납치하고 사고 팔았던 것과는 달리, 조선은 동남아 원주민 노예들이나, 아프리카인 노예들을 납치하거나 대규모로 보유하지 않았다. 조선에 도착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에 관해 기록된 예는 앞서의 4명과,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파병 군대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용병들이었던 "아프리카계 용병 해귀(海鬼)"뿐이었다. 선조실록 및 후대 실록들에 따르면, 당시 세계 패권국 명나라 파병군의 팽신고(彭信古) 장군이 조선에 파병한 신병(神兵) 중 눈동자가 노랗고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 흑인 병사들 수십여 명을 "해귀(海鬼)"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이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러나 이들 해귀는 과거의 태조에게 바쳤던 말레이 원주민 노예들과는 달리 선조에게 바치기 위해 끌려 온 노예들이 아니라 명나라 파병군들이 임진왜란 때 써먹기 위해 끌고 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 용병들이었기 때문에 "잠수병"이라는 병과를 부여한 후 수중 군사 작전을 수행하도록 명령내렸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조선에 남기진 않고 죄다 데려가서 그들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조선이 영구적으로 보유한 외국인 노예는 실록상 4명 정도였다. 이들은 모두 조공으로 바쳐진 노예였으므로, 조선에 온 후에는 일단 귀족 군인의 대궐 경비 등에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결국 조선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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