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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량의 법칙

by 물길


자신을 알기는 어렵다

삶에 있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총량의 법칙은 더 더욱 중요하다

모든 생명에는 이루고자 하는 일에 그 총량이 정해져 있으매, 이를 넘어서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필시 그 부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행복도, 불행도, 재산도, 건강도, 사랑도... 모든 일에는 총량이 정해져 있다.

행복하게 살면,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 용량이 다 차기 전에 비울 수 있어야 한다.

불행도 가득 차면 비워져 없어지므로 인내하고 개척할 필요가 있다. 재산도 용량이 차면 없어지기 시작하고, 건강도 총량이 있어, 평생 건강할 수 없다. 배가 부르면 먹는 것을 중단해야 탈이 나지 않는 것도 총량의 법칙에 속한다.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총용량이 중요하다. 너무 머리를 써서 뇌가 잘 돌아가지 않으면, 머리에 가득한 것을 버려야 한다. 여태까지 쌓은 것을 어떻게 버리냐는 욕심도 생겨난다. 주어진 용량 이상으로 사용하면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와 마찬가지로 껌뻑거리며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과량으로 사용하면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살아가는데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 용량도 정해져 있어 더 심하게 운동하면 나와 같은 일이 생긴다. 뼈에 금이 가서 깁스를 하고 시간이 흐를 때까지 쉴 수밖에 없다. 욕심도 마찬가지다. 용량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면 막지 못할 일들이 생긴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총량은 정해져 있다. 이 총량을 넘어서려 하지 마라. 분명히 자신이 제어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총량의 법칙을 벗어나려 하지 마라.


우리는 살아가고, 살아오면서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이, 동서남북으로 막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한 번쯤은 뒤돌아보고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진정으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더불어 나는 죽어도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 이 일을 하다가 내 모든 것이 무너져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고, 아주 당연히, 또는 이일 밖에 없는가에 대하여 마지막 힘을 쏟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 한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생각이 오기로 뒷받침하고, “이 한 번의 기회로 일어서고 말 것이야”하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해야 한다면, 다른 길은 없는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태껏 내가 이 일을 준비 해 왔는가에 대하여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나의 욕심이 아닐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챙겨봐야 할 일이다. 내가 이런 일들을 하면서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전에 비교하여 많이 나아졌는데, 좀 더 나아지기 위하여 ‘좀 일을 넓혀 볼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살만한 위치에 도달했는데 좀 더 넓혀 볼까 하는 생각이 있을 땐, 어떤 복이 있어 나를 이렇게 세웠는가를, 다른 말로 나의 행복 총량 중에서 얼마나 썼을까 하는 생각해 봄직하다. 옇든 내가 없는 복에서 이만큼의 위치에 섰다는 것은 내가 가진 복의 총량 중에서 많은 량을 썼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도 이 일을 해야 하겠다면, 사용했던 량을 좀 채우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복을 씨앗 심듯이 심어야 한다. 당신보다 못한 사람을 위하여 총량 중에서 비워 주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보이지 않게 기부하는 일이다. 이 일들은 내가 많이 사용하여 총량 도달에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타인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총량에 여유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복은 스스로 심어야 돋아난다.


우리는 욕심과 희망을 곧 잘 혼돈하여 사용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것이 희망인지, 욕심인지 구별도 못하고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희망은 내가 이루어 보고자 하는 일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내 생각대로 이루고자 하는 일은 희망이 아니다. 왜, 나의 조그만 소망조차 욕심이라고 하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희망”의 사전적 풀이는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그리고, “앞으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풀이 되어 있다. 그래서, 희망이란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라면, 그 숨은 뜻은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희망은 ‘희소(稀少)하게 이루어지는, 매우 드물고 적게 일어나는 일이다’라고 인지해야 한다. 이루고 싶다고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요행에 가깝다. 희망한다면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즉,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결과로 이루어 지는 것이 희망이다. 욕심은 희망과는 별개로 노력 없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희망을 조금 진하게 힘을 주어 이야기하는 것인데, 무얼 그리 다그치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 욕심이다. 욕심은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루어질 것 같기도 한 것이 눈앞에 빙빙 도는 것이다. 소박한 희망이라도 자신의 노력이 없을 경우에는 욕심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희망의 끝은 위대하고 자신의 노력에 감동이 일어나지만, 욕심의 끝은 스스로의 패인을 인정할 뿐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모든 생명들은 최선의 노력으로 희망을 이룬다. 식물도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가뭄이 계속되고, 태양이 혼을 빼어나가려고 해도 꺾이지 않고 버티며 지고의 노력을 다한다. 땅이 가물면 스스로 노력으로 물을 찾아 뿌리를 내린다. 그 고독한 환경에서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순종한다. 그 결과로 조금이라도 비가 내리면 얼마나 고마워하는가. 말라 잃어가던 생명에 새로운 초록빛이 생성되고 금방이라도 푸르러져 감사함에 보답하지 않던가. 목이 말라 피우지 못한 꽃들도 방긋 방긋 인사하지 않던가.


우리는 이루지 못한 희망에 대해서 마음 앓이를 많이 할 것이다. 또한 후회도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나의 노력이 희망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래서 극히 후회하거나 자신을 갉아 먹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희망이란 이루어 질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라서 다시 마음 잡고 출발하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옛날에는 사법고시 공부하는 것이 큰 희망인 사람들이 많았다. 몇 년이고 공부하면서 이루어질 때까지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희망의 이룸으로써 보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사회가 개방되어 가고, 개인 간의 편차를 없애는 방법으로 바뀌어져서 실제로 희망을 걸만한 테마조차도 없어져 갔다. 그 결과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찾던 희망은 욕심으로 바뀌어 가고 결국 나는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어둠속의 햇빛.png

[어둠속의 햇빛}


내가 바라는 희망은 끈질기게 나와의 투쟁을 감수해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교수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지 15년 만에 교수가 되었다. TV만 켜면 교수들이 나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그리고 학생들과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한다는 것이 그렇게 좋아서 나도 저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박정희 정권의 말기였고, 독재가 말로 못 할 만큼 억누르고 있을 때, 나는 3학년 때 대학 학보사의 사진기자가 된다. 계엄군이 학교 운동장에 진을 치고 있을 때라 기자증 하나로 들락거릴 수 있었고, 그 상황을 신문에 옮겨 선배들과 같이 신문을 만들곤 했다. 신문의 절반 정도는 언론 검열에 긁히어 빈 상태로 보급되곤 했다. 교수가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만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10/26이 정리되고 다시 도서관 지하실의 공부방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대학원 시험과 약사고시 준비를 동시에 해나가면서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대학원 3학기를 끝낸 후, 장교 시험을 치르고 광주보병학교에 입교하여 81년 여름에 임관하여 전방 백골사단에 발령을 받아 근무에 들어갔다. 이때 세월의 배반에 대하여 많은 경험과 나아갈 길을 실습했다고 생각한다. 학사장교 1기는 처음 생긴 제도라, 그때 당시에는 모집하는 곳으로 발령을 내어 준다는 말에 이것이 기회다라고 생각했다. 부산에 발령을 받으면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실험을 계속할 수 있고, 영어 및 외국어 학원에도 갈수 있다는 장점만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약사 면허증이 있으면 야전 병원으로 발령을 낸다는 소식도 나를 나의 희망 가까이에 데려다 놓았다.


사실 모든 것을 세상의 탓이라고 해도, 약사인 나를 야전 병원이 아니라 전방 사단 의무대로 발령을 냈다. 말 그대로 하는 일이 보병 장교 역할 이었다. 병력 및 예비군 훈련을 전적으로 전담했다. 사단 및 군단 훈련에 참여하고, 약업무와 관련되는 일은 한참 후에 약품 보급을 맡은 일이었다. 그래도 일본어 공부는 BOQ에서 계속하여, 언제라도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의 일을 맡아 군대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에 틀림없었다. 나의 계획과는 너무도 동떨어지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국가를 믿는다는 것과, 나의 필요에 따라 유리한 것만 들었다는 것, 세상을 확실하게 공부하고 복습하는 일이 나의 한 부분이 되었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것”을 스스로 정의하고, 나라를 믿지 않는 일만이 나의 길이 되어 갔다.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 둘 곳이 전혀 없는 나라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운명인가 하고 생각했을 때 정신이 바싹들었다. 나는 나의 희망을 썩혀서는 안된다는 생각만 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제대 후 희망을 지키러 혹독하게 열심히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제는 희망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아주 큰 오산이었다. 외국에서 박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내에서 학위를 했다는 것이 또한 나의 길을 막고 섰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 어려운 고비에서 생각났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서 혼자 길을 찾는다는 것은 생존의 확률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일이 된다. 그래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되고, 그분과 함께 나의 길을 찾았다. 그 누구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인생의 제자로 받아 줄 것인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 역시도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그분의 실험실에서 학부생, 대학원생과 함께 실험하고 발표하러 가고, 논문을 쓰고, 정보를 얻고 하는 일에 그분의 노력과 헌신이 없었다면, 나는 사막에 버려진 한 포기 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아시스도 없는 뜨거운 사막에서 차츰 말라 생명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사막에 던져진 풀은 하늘의 도움으로 가끔 비를 맞고, 뿌리를 내려 생명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댈 수 있는 나무가 있어 삶의 전환기를 맞아, 그렇게도 머나먼 희망을, 아주 드물게 이루어지는 희망을 이루게 되었고, 희망을 품은 지 15년 만의 일이다. 누구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두 나처럼 어려운 험한 길을 지나치고 나서, 그 어려운 희망을 손에 넣었으리라 생각하며, 희망을 이룬 사람들에게 모든 기운을 모아 수고했다고, 열심히 했다고 말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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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희망]


15년이란 세월은 아기가 태어나고 중학교에 다니는 시간이다. 나에게는 15년 동안의 삶의 줄거리가 없다. 아가를 업어주지도 달래주지도 못하고 희망을 이루는 곳에만 신경을 집중했고, 사람의 형체는 뭉개어져 갔고, 사는 의미를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희망이 도래된 후 흘러간 시간이 아까워 또, 그 생활에 집중하게 되고, 그 생활의 리듬을 지키지 못하는 영어의 시간이 되어갔다.

그래서 지금 생각한다. 나에게는 희망의 총량 중에서 희망을 이루는데 거의 95% 이상을 사용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생활 외에는 나의 남은 행복의 총량을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다시 일어서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정년 후에 한번 해보고 싶은 일, 내가 연구하고 특허 낸 것을 한곳에 모아 회사를 차려 보는 것이었는데, 그 이상의 욕심은 낼 수 없게 되었다. 해보고 싶어도 내가 사용 할 수 있는 총량이 바닥을 쳐, 복을 더 쌓기 전에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조금 남은 총량 중에서, 그래도 쓸 수 있다면 건강에 투자해야 할 것 같다. 건강에 따른 총량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생각한다.


그래서 건강의 향상을 위하여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는 헬스장에 가고, 또 다른 날은 새벽에 걷기 운동을 한다. 총량은 능력의 한계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힘든 것에 속한다.

예를 들어, 아주 잘 살고 싶기도 하고, 아기도 갖고 싶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나의 직업도 보통 사람들보다 좋아야 하고, 아이들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고, 좋은 직업을 갖게 하고 싶고, 유학도 보내고 싶고, 좋은 차도 굴리고 싶고, 예쁜 사람과 결혼도 하고 싶고, 유명 해지고 싶고, 훌륭해 지고 싶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해내려면, 내가 가진 복을 모두 나누어야 하는데, 한곳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복을 태산같이 많이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가 이건 무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또한, 복이란 사용한 것만큼은 복을 지어가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상태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해야 한다. 절대로 동시에 많은 것은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상식적인 측면에서 인정해야 그 다음이 보일 수 있다. 이에 따라 인생도 그렇게 길지는 않다. 누구나 한번 실패하면 일어나기 어렵고, 다시 세월을 견디며 복을 짓는다 해도 세월은 아주 멀리 가 있을 것이다.


현실의 고마움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더 나빠지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자신을 토닥여야 한다. 내 인생은 끝났다가 아니라 더 나빠질 것 없는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다. 대신 여러 가지를 펼칠 것이 아니라,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이 훨씬 좋을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경험이 있고 자신이 있는 부분을 하는 것이 좋다. 전번에 좋지 않았던 때의 데이터를 살피고 운용하는 것은 경험 있는 쪽이 훨씬 다양한 전략을 펼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 가지만 죽도록 파면, 한 곳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다른 것이 잘 안 보일 수가 있다. 내가 집중하는 방향이 맞는지 아니면 여러 가지 환경상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긋나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꼭 이루고 싶은 일에 대하여 집중해서 해 가는 일을 누가 말릴 수는 없을 것이나, 항상 적은 나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혹, 나의 희망이 눈앞에 와 있는데, 스스로 이것이다고 기쁨으로 가득 찰 때, 나의 건강은 어떠한가를 살펴봐야 한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총량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는 말이 된다. 슬기롭게 하되 스스로를 한번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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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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