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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Oct 02. 2022

가을은 시린 가슴으로부터 온다

원을 들어줄 수도 없는 매미의 통곡을 끝자락으로 귀뚜라미가 가을을 이고 왔다. 들판은 찢어질 듯 잔인하던 여름의 손길이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걷이를 눈앞으로 끌고 왔다. 

가을은 눈으로 오기보다는 시린 가슴으로부터 온다. 아침에 소슬바람 따라나섰다가 난데없이 폭염에 찌들다 다시 찾아오는 저녁은 세월의 풍파를 알려 주는 듯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따갑던 햇볕이 이젠 제법 같이 놀자고 다가오고, 고운 손도 내미는 것을 보니 여름에 바싹 말라붙었던 마음이 슬슬 풀려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시간은 흐르고 석양을 따라가 멀어졌던 마음들이 살금살금 고양이 먹이 찾듯이 다가오나 보다.     


가을 손님은 이미 내 마음이 풀어져 있어 모두가 눈에 꽉 차 있어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와도 미울 것이 없다. 들판의 허수아비 모습도 참 정겹다. 새들과 싸워야 하던 때의 일그러짐이 바람 타고 흔들릴 때는 미소로 바뀐다. 먹어야 사는 참새와 배고파도 지켜야 하는 허수아비와의 전쟁은 옛날에는 아주 고달팠을 것 같은데 세월이 진화한 지금에는 그렇게 앙숙 같지는 않아 보인다. 참새도 수업 시간에 전기와 전자에 대하여 숱하게 배우고 익히나 보다. 총소리는 간단하게 피해 가면 될 것 같은데, 요즈음의 전자장치는 심리전까지 겸하고 있어 새들도 노력하지 않으면 참으로 시대에 뒤떨어져 구박받기 일쑤일 것 같다.


[구멍난 잎새(창선도), 2018]

벌써, 원앙이 놀던 자리에 철새 떼가 밀려와 언쟁하고 이웃끼리의 시비는 꼭 아파트의 층간 소음같이 들려온다. 아무리 저렇게 싸워도 저놈들은 생명은 빼앗지 않는데, 인간이란 잠시 불같은 성질을 죽이지 못하여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새들 사이의 조약은 불문율이기는 하나 잘 지켜지고 있는데, 아는 게 병이라고, 글을 써서 지키라고 내민 법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찢겨 나가고 있으매, 누가 현명한지는 참으로 모를 일이라.이 가을에는 비가 오나, 오지 않으나 마음으로 젖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정서인가 계절의 시킴인가, 사람들이 감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길 가다가 낙엽을 밟아도 내 발이 아닌 낙엽이 아픈 것 같고, 괜스레 미안해지는 것을 보면 말랐던 감성이 가을에 젖어가는 것이다. 낙엽을 보더라도 이쁘다는 것보다는 구멍이 나 있는 낙엽을 보면 괜히 내 마음에 구멍 난 것처럼 애달프고 그 원인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왜 다른 것들보다 빨리 떨어졌을까, 얼마나 마음이 고왔으면 자기의 몸을 먹이로 내어 주었을까, 힘이 없어 당한 것일까 하는 마음으로 말을 걸고 싶고, 도와주지 못한 데 대한 안쓰러움도 같이 하곤 한다.     


조그마한 화단에 꽃무릇의 대가 올라오면 참, 저렇게 또 떠난 임 찾으러 울고불고하겠네 하는 연민의 정이 돋아나기도 하고 피어 있는 꽃무릇을 보면 저렇게 이쁜 것이 어쩌다가 임을 놓치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에, 나도 옛날 그 사람 따라갔으면 지금보다 낫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는 미련과 서로 아웅다웅하더라도 내 님이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일까 하는 행복에 젖어보기도 할 터이다. 참, 이쁜 분꽃도 토담집 울타리에 걸터앉아 시원한 키에 많은 자손을 거느리며 피우는 분홍색 꽃을 보면서, 아 참, 우리 아이, 이빨만 두 개 난 손자, 눈앞에 가물거리며 자주 볼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애잔한 마음도 이끌려 이른 아침에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가을비가 온다. 쩍쩍 갈라진 마음에 생명 같은 빗물이 스며든다. 갈라졌던 마음이 이어지고, 마음속에 꿍쳐둔 기억들이 새싹 돋듯 꿈틀거리곤 한다. 나름의 이론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죽어서도 만난다는 말속에 아지랑이처럼 다 못한 정이 스미어 나와 이따금 눈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말이 썩어 빠진 자존심 속에 내버려져 있어, 전번에 잘못했던 일들도 용서받기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마음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땅만 바라보고 걷는다.     


가을은 무엇을 해도 용서가 되는 계절일 것 같아서 더 마음 조여 온다. 훨훨 날아가고 싶어도 엉덩이에 끄나풀이 매어져 있는 것 같고, 지금 아니면 후회할 일이 뻔한데도 마음이 움직여 주지 않으니 답답하기도 하다. 그래서 가을은 우리에게 씨앗을 주나 보다. 언제라도 싹을 틔울 수 있게 심고, 싹이 트면 같이 뜻을 키워보라고.      

비가 오는 가을밤에 감기 들까 망설이고 앉아있는 것보다는 가을비를 가슴에 적시러 빈 마음으로 나가 속으로 젖어 보는 것도 이 가을을 맞이하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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