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야기
느닷없이 무거워지는 마음과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잡다한 정보들을 치워내고, 그 자리에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을 채우고 싶었다. 가을 때문이었다. 마침 손이 닿는 곳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이 눈에 띄어 꺼내 들었다. 때 이른 눈 이야기가 성급하달까. 하지만 그 유명한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는 여전히 신비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야스나리가 쓴 『소설의 구성』도 읽었는데, 그 덕인지 주인공들의 심리가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는 소설을 그저 ‘이야기’로만 읽었는데, 지금은 야스나리 덕에 소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창작물에서 인물의 성격 변화를 섬세하게 살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설국』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레 시에나의 두오모를 상기시켰다.
2019년의 유럽 여행은 어떤 면에서 도피성 여행이었다. 하던 일이 잘 마무리되지 않았고, 그 덕에 시간이 조금 생겨 여행이나 가볼까 고민하던 차에 유럽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시끄러운 마음을 다스리고자 몽골의 테를지 국립공원에 가서 일주일 동안 하늘이나 쳐다보고 올까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면에서)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간 와인을 공부했으니 와이너리 투어를 하면 조금 더 ‘생산적인’ 여행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이탈리아행을 택했다.
나의 성향은 즉흥적이고, 여행 방식 역시 그러한데 이런 성향은 여행지에서 뜻밖의 만남과 정서를 발견하게 해 준다. 와인을 목적으로 한 이 여행에서도 나는 뜻밖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늦은 저녁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동안 가져왔던 여행관이 바뀔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다. ‘인공물은 자연을 넘어설 수 없다’는 명제가 ‘아마 아닐 수도 있겠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둑한 피렌체 두오모 앞에 서서, 은은한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성당을 바라보았을 때 느낀 전율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아닐 수도 있겠다’라고 확신하게 만든 것은 시에나의 두오모였다.
피렌체의 일정을 만족스레 소화하고 오후 늦게 시에나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구시가지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발코니에 나가면 저 멀리 언덕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시에나 두오모를 바라볼 수 있었다. 발코니에 앉아 성당을 바라보고 있자니 노을이 만들어내는 시에나 두오모의 화려한 색감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자연스레 베로나에서 사 온 관찰레를 꺼내 먹기 좋게 썰고, 끼안티 와인을 열었다. 숙소에서 두오모가 보이는지도 몰랐고 시에나 두오모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도 모르고 갔음에도, 가장 아름다운 외관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가볍게 아침을 차려 먹고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중세의 돌 도로와 성벽, 말을 매어 놓는 철제 구조물이 아직도 벽에 박혀있는 풍경은 피렌체를 거쳐왔기에 아주 낯설지는 않았지만, 피렌체와는 또 다른 고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천천히 길을 줄여 두오모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악기 소리가 들렸다. 약간 금속성이라 부드럽지는 않지만, 독특한 구조 때문인지 울림이 개성적이어서 기억하고 있는 소리였다.
놀랍게도 잘츠부르크와 베네치아에서 봤던 바로 그 연주자가 시에나에서도 연주하고 있었다. 들쑥날쑥한 여행 일정에서 같은 사람을 세 번이나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베네치아에서 두 번째 봤을 때도 신기해서 CD를 샀었는데, 시에나에서도 만나다니 놀라웠다. 하지만 이 놀라움은 나만의 것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붙이기 어려웠고, 문득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낮은 확률의 우연은 때로 필연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니까.
이런 놀라운 마음을 안고 두오모에 들어갔기 때문일까. 내 마음은 화려한 성당 안의 아름다움에 한껏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녹진해져 있었다. 여러 가지 색의 대리석으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조각해 세운 벽과 기둥들, 나무와 대리석, 금박으로 장식된 제대와 의자, 역대 성직자와 성인들의 조각, 천장의 경이로운 조각 등 티끌만큼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도 다빈치나 라파엘로의 그림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성당 전체가 내뿜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다소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조형에서 나오지만, 감각적인 일탈을 품은 아름다움은 더 큰 감동을 준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시간을 들여 성당을 둘러보고 나왔을 때는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도 좋을 것 같았다.
『설국』에 가득 채워진 아름다운 문장이 온갖 조각과 색으로 채워진 시에나 두오모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 오묘한 연상이 상쾌한 환기를 불러왔다. 가을이 몰고 온 멜랑콜리를 깨끗하게 쓸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