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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Jun 16. 2021

덕업일치에 실패했다


인숙의 오랜 말버릇 중 하나는 '너 좋은 대로만 살 수는 없다’라는 말이다. 이것저것 간만 보다가 매번 끈기 없이 그만두는 아들내미가 아무래도 위태로워 보였는지, 그 배려심 깊은 엄마는 내가 무언가를 그만둔다고 말할 때마다 핀잔을 주었다. 거기에 대고 나는 늘 '엄마가 뭘 몰라서 그런다'라고 항변했다. 아웅다웅하던 우리의 대화는 항상 '저 좋은 거만 하려 한다’는 이인숙 여사의 수미쌍관씩 일갈로 마무리됐다. 나보다 곱절의 세월을 더 살아온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사회에 발을 들이고 나면 무엇 하나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기란 불가능하단걸.


어린 시절에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되려 제대로 심통을 부려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냅다 연필을 내던지듯 청개구리 기질을 십분 발휘해 늘 좋아하는 것만 하려 했다. 그렇게 피아노도 쬐끔, 글쓰기도 쬐끔. 어느 것 하나 끈덕지게 좋아하질 못하고 찔러보기만 했다. 그렇게 기나긴 허송세월을 보낸 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애매하게 좋아하는 것만 많은 어설픈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고 이내 나이에 등을 떠밀려 사회에 진출(당)하고 말았다.


어영부영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엄마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어느 것 하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출근길과 그보다 더 괴로운 야근을 반복하며 어떤 날은 차라리 '지금 타고 있는 버스에 작은 사고가 나서 출근하지 못했으면'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회사의 업무라는 게 마치 좋아하는 것 외의 일만 딱 떼어놓은 여집합을 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면 조금 달라질까. 그렇게 나는 덕업일치를 좇아 도망쳤다.


두 번의 면접을 거쳐 쟁취한 덕업일치를 동네방네 자랑했다. 돈 깨나 쓰는 게이머들은 자기가 넥슨 본사 기둥을 하나씩 세웠다며 허풍을 떨곤 하던데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취미로 이 회사에 쓴 돈을 헤아리면 기둥 두어 개는 너끈히 세웠을 거라며 내심 자부했다. 한 선배는 '지금보다 월급이 더 낮아질 수가 있어?'라며 황당해 했지만 나는 해맑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덕업일치를 이룬 그때의 나는 쌍팔년도의 스포츠스타라도 된 거처럼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상태였으니까. 좋아하는 일이라면 대가리를 처박은 채로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참, 멍청하게.

덕업일치의 행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풍비박산이 났다.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지 삼일차에는 한강공원에서 5m 높이의 사다리에 안정장비 하나 없이 올라야 했고(심지어 사대보험도 가입하지 않았을 때다), 택시 할증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벽 4시 이후의 퇴근도 잦았다. 또 어떤 날은 출근 30시간 만에서야 퇴근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제대로 된 끝이 정해지지 않은 업무들로 몸과 마음과 생활이 된통 망가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건 좋아하는 일을 만드는 회사에서 정작 내가 좋아하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누더기가 된 뒤에서야 그 직장에서 도망쳤다. 즐겨 듣던 노래가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트리거로 전락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제서야 '너 좋은 대로만 하고 살 수 없다'라는 이인숙 여사의 말버릇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덕업일치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바보 아들에게 에둘러 말한 거라는 사실을. 기세등등했던 덕업일치는 7개월 만에 싱겁게 끝이 났다.


새로운 곳에서 조금씩 상처를 회복할 무렵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일은 어때요?'라는 안부에 나는 '재미있지만 힘들어요'라며 별생각 없이 너스레를 떨었다. 분명 1년 전 동일한 질문에 나는 '힘들지만 재미있어요'로 대답했던 것 같은데. 고작 어순만 바뀌었는데도 그 두 가지 말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힘들지만 재미있다는 말이 아직 충분히 버틸만하다는 뜻이라면, 그 반대는 '재미와 힘든 노동을 저울질하고 있지만 언제든 내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라는 의미일까.


그날 맞은편에 앉은 덕업일치의 현신은 새롭게 맡게 된 업무를 두고 '재미있지만 힘들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회사일이라는 게 모두 그렇듯, (좋아하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의 업무도 덕업일치와 크나큰 간극이 있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힘든 것을 꾹 참고 이겨내는 애정과 노력, 그 정도의 정성이 내게는 부족했던 걸까.


최근 코딱지만 한 연봉을 조금 인상하여 낯선 업계로 이직할 기회를 얻었다(그래봐야 조금 큰 코딱지 수준이다). 충분히 쉬었으니 망설일 것도 없었지만 괜한 거북함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부터 너무 멀리 가는 기분이 들어서다. 인상된 금액을 무엇에 소비할지 빈 종이에 몇 가지를 끄적이곤 이내 결론을 내렸다.


엄마의 예언처럼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새 회사에서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외신을 뒤적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끄적이는 게 아무래도 못할 일 같았다. 미련 없이 입사를 반려한다는 메일을 전송했다.


메일을 보내자마자 이인숙 여사님의 착신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렸다. 한 줌도 안 되는 스마트폰이 왜 이리도 무거운지. 아무래도 나는 요령부득 구제불능의 인간인 걸까. 이미 덕업일치에 실패했으면서, 아직까지도 저 좋은 것만 하려는 미성숙의 애새끼맨인 걸까. 미안해요 엄마, 저는 글렀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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