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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Oct 23. 2021

백수와 신포도

은밀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잡플래닛에 들어가 관심 있는 기업의 리뷰를 뒤져보는 것이다. 익명으로 쓴 적나라한 리뷰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인이 왜 해학과 풍자의 민족인지 새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 : 자유도가 높다 못해 폭주하는 곳. 대학교 동아리를 체험해보고 싶다면 가볼만한 회사

★ : 오지마세요. 뒤집니다. 급여 짜고 개힘듭니다. 어거지로 하는 중

★ :  할인쿠폰 돌려돌려 돌림판. 직원들 갈아갈아 갈림판


극한에 다다른 감정이 인간의 창작력에 불꽃을 지피기라도 하는지 잡플래닛에는 박평식 평론가 부럽지 않은 가혹한 별점과 한줄평으로 가득하다. '그래도 업계에 우리만한 회사 없다'는 다소 작위적인 리뷰와 '별 다섯 리뷰는 경영진이 쓰셨나 봐요 깔깔' 로 시작하는 저격글까지, 전/현직자들의 재치와 울분이 뒤섞인 후기를 보며 한참을 낄낄거린다.


리뷰의 몰입감이 여느 킬링타임 영화 못지않아 매번 시간이 삭제되는 경험을 하고야 만다. 그날 리뷰 탐방이 끝날 즈음이면 회사에 품고 있던 기대감은 사라지고 매운맛의 강렬한 후기만 씁쓸하게 남는다. 그리고 이내 형이상학적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과연 직장인에게 '좋은 회사'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아이고, 어쩌다 이 업계로... 파주 님은 아직 젊으니까 빨리 다른 곳으로 뜨세요. 저는 이미 늦었어요."


가는 곳마다 직장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농담이 떠올랐다. 아마 업계의 쓰디쓴 현실(연봉)과 미미한 성장 가능성(연봉 상승률)을 계산하여 건넨 조언이었을 거다. 당시에 나는 퇴사를 종용하는 이들의 말이 흡연자의 허세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입으로 연기를 뿜으며 '후... 너는 이런 거 피지 마라'라고 읊조리는 그것 말이다.


엄살을 피우며 업계를 뜨라던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른 출근과 잦은 야근은 물론 주말이나 연차 당일까지도 출근을 감수하던 바쁜 직장인들. 말꼬랑지 수준의 월급을 받고도 일 마력쯤 되는 힘으로 일감을 후다닥 해치우는 워커홀릭들. 내가 아는 한 퇴사를 말하던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저는 이미 늦었어요.' 나를 스쳐간 츤데레 워커홀릭들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이미 늦었다는 말은 업계에서 포기하기 아까울 만큼의 경력을 쌓았다는 말인 동시에 되돌아가기 불가능할 정도로 그 일에 흠뻑 빠져있다는 고백처럼 느껴졌다. 신입사원을 향한 한숨 섞인 그들의 퇴사 종용이, 진득한 애정 없이는 이 업계에 종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대학 선배를 만났다. 츤데레 워커홀릭 부류의 직장인인 선배는 백수가 된 나에게 물었다.


"네가 정말 가고 싶은 회사는 있어?"


무어라 답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나의 넓은 관심사와 내가 가진 (그렇지만 당장 나도 알지 못하는) 잠재력을 알아줄 회사와의 운명적 만남을 기다린다는 허황된 말을 지껄였던 것 같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의 얄팍한 능력과 게으른 천성으로는 가고자 하는 회사에 합격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정신건강에 이롭고 나태함을 변명하기에도 좋은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겁한 여우가 닿지 않는 포도를 신 포도라며 합리화했듯, 기업의 별 하나 짜리 리뷰를 공들여 찾아가면서. 이 기업은 연봉이 짜대요, 저 기업은 워라밸이 나쁘다네요. 참, 비겁하게.


오늘도 습관처럼 잡플래닛을 켰다.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내 회사 싫어병'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의 푸념을 찾았다. 회사 혹은 경영진을 향한 미운 말들의 끝에 어떤 활력이 생동했다.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 책상에 놓인 컵을 들었다. 냉수를 들이켰을 뿐인데 입에서 아주아주 떫은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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