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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Oct 23. 2021

잃어버린 근본을 찾습니다

최근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 말 한마디에 무력감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경력직 면접 자리에선 꽤나 매서운 질문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이직하셨는데 여기도 1년 다닐 건 아니죠?”

“담당했던 업무가 조금씩 다르던데, 경력이라고 봐야 할까요?”


3년차 경력과 3곳의 직장, 3개의 직무. 고단수인 인사담당자에게는 잡스러운 경력을 지점토 붙이듯 얼기설기 엮어 제출한 이력서가 손쉬운 먹잇감처럼 보일 게 뻔했다. 약점을 간파 당하면 이마에는 여지없이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내 날선 질문들이 뇌리에 콕콕 박혀든다. ‘그러니까요, 그게 말이죠...’ 그럴 때마다 미처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어물거리게 된다. 면접이 진행되며 질의의 난이도가 고조됨에 따라 심박 수가 치솟고 호흡마저 가빠진다.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질문이고 이미 수차례 당했는데도,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구질구질한 변명에 가까운 답을 늘어놓고 나서야 굳어있는 면접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숨만 안 쉬었다 뿐이지, 마스크 위쪽의 표정만으로도 이미 이 면접이 망했다는 걸 직감할 수 있다. 복싱은 잘 모르지만 어설프게 가드를 올린 채 수도 없이 펀치를 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그 뒤로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다음 질문드릴게요. 파주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대뜸 이쪽의 근본을 물어오는 근본 없는 질문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그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는 듯 면접관을 빤히 쳐다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친절한 눈빛을 띈 자비심 없는 면접관은 똑 부러지는 말투로 질문을 재차 던졌다. 솔직히 ‘그 항목은 자기소개서에 충분히 적어두지 않았나요? 분량이 모자랐나요?’라고 되묻고 싶지만 이미 입이 절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까 저는 여기저기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고요. 책 모으는 걸 좋아하고 음악 듣는 걸 그보다 조금 더 좋아하고... 영화도 그럭저럭 좋아해요. 어... 또, 한화이글스랑 리버풀 팬이고... 어...”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멍청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주접스럽게 나열하고 말았다.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기는 커녕 나조차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몽땅 내뱉고 나서야 시야가 돌아왔다. 면접관을 표정을 보자마자 이 면접의 결과를 100%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진짜 개망했네. 그 뒤로 면접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집으로 돌아와 애꿎은 베개와 이불을 두들겨 댄 기억만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뒤에야 쪽팔림의 구렁텅이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이불 걷어차는 걸 그만두고 나를 한방에 넉다운시킨 그 질문을 곱씹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면접에서 떠벌거린 것처럼 나의 취향이 나를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걸까. 퍼스널 브랜딩이 득세하는 시대라는데 본인도 제대로 자랑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시대에 뒤처진 모지리가 아닐까. 아니, 애초에 몇 마디 말로 어떤 사람인지 온전히 설명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나는 어떤사람인가. 차라리 스무 살 때의 내가 이 질문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싶은 게 많았던 투지 넘치는 시기였으니 찰나의 고민도 없이 답하지 않았을까. 좋아하던 게 무엇인지 맹렬하게 쫓던 스물다섯 때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답변을 찾을 수 있었을 거 같다. 사회(직장)의 쓴맛을 찔끔 맛봤을 뿐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단정 짓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떠벌리기엔 그 분야에 나보다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인재들이 즐비하다는 걸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덕업일치에 실패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취향에 대한 애착도 희미해진 탓에 이제는 이거 없으면 못 산다 내세울 만한 것도 딱히 남아있지 않았다. 겨우 몇 년 사이에 나는 열정도 취향도 변변찮은 심심한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몇 주째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지만 좀처럼 정리가 되질 않았다. 재능도 열정도 애매한 맹추. 자기PR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시류에 도태된 밥통. 고작 질문 하나에 자기혐오에 빠지고 무너지는 게 억울해서라도 꾸역꾸역 답을 찾아내야 했다.


다시 한주. 오랜 고민 끝에서야 그런대로 괜찮은 답을 하나 길러냈다.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 ‘나는 이거다’하고 냉큼 단정 짓지 않는 인간이 되기로. 뭐든 쉽사리 확신하지 않기로. 스스로 내 근본을 하나로 퉁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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