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들과 소연의 정체성
지금의 걸그룹 시장은 트와이스의 영향을 받은 발랄 컨셉, 그리고 여자친구의 영향을 받은 청순·아련 컨셉이 지배적이다. 예외라면 소속사의 음악적 색깔을 이어 받은 레드벨벳과 블랙핑크, 범접할 수 없는 비글거림을 기반에 둔 마마무 정도가 되겠다. 이에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기 위해 여러 팀들이 다변화를 꾀했으며, 오마이걸 · 우주소녀 · 드림캐쳐 · 아이즈원 · 있지 · 이달의 소녀 · 가을로 가는 기차 등 기존 걸그룹과 차별화된 매력을 내세운 그룹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 중에서도 ‘(여자)아이들’의 등장은 신선했다. 통상적인 걸그룹 이미지와 다른 강렬한 컨셉을 들고 나왔으며, 뭄바톤 스타일의 곡을 독특한 호흡으로 풀어가면서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게다가 이 모든 멤버 ‘소연’이 프로듀싱에 전면적으로 나선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걸그룹으로는 드문 유형인 이른바 ‘뮤지션형 아이돌’로서의 기대감이 커져 갔다. 소연의 인지도, 신선한 음악과 컨셉, 신인에 대한 기대치 등이 맞물려 <라타타 LATATA>는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뒀다. 3개월 뒤 발표한 <한 (一)> 또한 흥행을 이어갔고, 공개 4일만에 유투브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1,000만 건을 돌파하며 달라진 명성을 입증했다.
(여자)아이들의 매력은 확고한 음악적 색깔이다. 다양한 주제와 장르 속에서도 팀의 색깔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일관적인 태도 덕분이다. 지금까지 발표한 12곡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특정 주제나 장르가 아닌 그들의 당당한 모습 그 자체이다. (여자)아이들의 음악에서 ‘나’는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너’와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우월적 위치의 당위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화자가 마주친 다양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면서도, 하고픈 말은 빙빙 돌리지 않는다. 이는 뚜렷한 자아 인식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태도와 표현이다. (여자)아이들의 음악적 기반은 그들만의 당당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달라 ($$$)>에서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의 자신감을 마음껏 뽐내고, <돈 텍스트 미 Don’t Text Me>에서는 이성의 연락을 단호히 쳐내며 다소 차가운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각기 다른 온도의 <메이즈 Maze> · <알고 싶어> · <싫다고 말해> · <주세요> · <블로우 유어 마인드 Blow Your Mind> 등에서는 이성에의 관심을 드러내며 사랑을 갈구한다. <라타타>와 <세뇨리타 Senorita>에서는 첫눈의 이끌림을 드러내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는 식의 솔직하고 관능적인 표현이 담겨 있다. <한>은 이별에 대한 감정을 다소 직설적으로 풀어낸 데 비해, <들어줘요>와 <왓츠 유어 네임 What’s Your Name>에서는 애절한 감성이 돋보인다.
(여자)아이들이 당당함이라는 키워드를 얻는 데에는 리더이자 프로듀서인 전소연의 역할이 지대하지만, (여자)아이들 이전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2016년 “프로듀스 101 시즌 1”에 등장하며 이름을 알렸지만 프로그램과는 이질적이었다. 20위는 분명 높은 순위지만, 재능은 충분히 어필되지 못했고 견고한 팬층을 만들지 못했다. 이후 무맥락적 디스가 난무했던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3”에서는 현역 래퍼들 사이에서 나름 선방하며 인지도와 호감도를 높였으나, 어쩐지 오글거린다는 평도 함께 받았다. 큐브 엔터와의 계약 소식이 발표될 당시에도 호의적인 반응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소연이 깔아 놓은 복선은 (여자)아이들 활동에서 제대로 터졌다. 재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악마의 편집과 악플 등으로 상처받는 와중에도 자신의 역할만은 분명히 해냈고, 특유의 자신감과 발칙한 가사로 이목을 끄는 데에 성공했다. 호불호 여부와 관계 없이 잠재력만큼은 인정받았으며, 공백기를 지나 (여자)아이들의 일원으로 데뷔함으로써 꼭 맞는 옷을 입었다는 호평을 끌어냈다. 어딘가 어설프고 억눌린 듯한 답답함을 벗어낸 모습에 대중들 또한 일종의 쾌감을 느꼈고, 2018년 최고의 신인이 되었다.
한편, (여자)아이들은 당당한 모습과 강렬한 컨셉으로 인해 ‘걸크러시’ 그룹으로 분류되곤 한다. 현재 청순/발랄 이미지의 걸그룹들이 워낙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다만 멤버들이 스스로 ‘걸크러시’ 혹은 ‘섹시’ 등을 언급하거나 어떠한 여성상에 대한 견해를 드러낸 장면은 흔하지 않다. 일부에서 (여자)아이들이 이상적인 여성상을 논하는 걸그룹의 예시로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해석에는 의문이 따른다.
오히려 여성상 논의와 관련지은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듯한 발언이 나왔다. 소연은 “멋진 여성상이라기보다, 사람이라면 당당한 모습이 멋있다고 느낀다. (중략) 저도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여자)아이들 곡을 쓸 때는 당당한 면이 나와서 그렇게(당당하게) 쓰게 된다.”라며 ‘여성’보다는 ‘사람’에 집중했다.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를 통해 형성된 고유의 가치관으로 자신과 타인을 인식하며, 자아 인식에서 비롯된 자신감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당당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사족. 미니 1집 “아이 엠 I am”의 시니컬한 모습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미니 2집 “아이 메이드 I made”는 다소 당황스러운 결과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세뇨리따>로 인해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다른 그룹에게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음악과 발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미 ‘장르 자체가 (여자)아이들’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라타타>의 임팩트를 재현하는 것보다 영리한 선택이다. 가시적인 성과도 물론 중요하지만, 단기 임팩트보다는 긴 호흡을 거쳐 서서히 스며드는 것이 낫다. 핵심은 좋은 음악이며, 그 근원은 다양한 겉모습에 숨은 일관적인 태도에 있다.
(여자)아이들 (G)I-DLE
수진(서브보컬·메인댄서) 미연(메인보컬) 슈화(서브보컬) 소연(리더·메인래퍼) 우기(서브보컬·리드댄서) 민니(메인보컬)
2018 05 02 미니 1집 "I am" / 활동곡 <LATATA>
2018 08 14 디지털 싱글 <한 (一)>
2019 02 26 미니 2집 "I made" / 활동곡 <Senori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