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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meLee Jan 29. 2023

사회 계약으로서의 도덕

윤리의 진화론적 기원 / 마르크시즘과 윤리학

목차  
1. 도덕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탄생했다.  
2. 절대적인 도덕은 없다.  
3.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자  

 몇 주 전, 주홍글씨를 읽으면서 "도덕"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큰 기둥으로 도덕과 법이 있지만, 이 둘의 작동 원리는 다르다. 법의 경우, 법령에 적힌 글을 기준으로 어떠한 행동이 옳고, 옳지 않은지를 판단한다. 즉, 명시된 기준이 존재하고, 이를 답안으로 행동을 채점한다. 반면, 도덕은 행동에 대판 판단 기준을 글로 표현하지 않으며, 개인의 의식 속에서 당연하듯이 존재한다. 재밌는 부분은 모두가 비슷한 판단 기준으로서의 도덕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즉, 법과 다르게, 도덕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암묵지로 갖고 있는 행동 기준이다.


 모든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지닌 "도덕"의 탄생 배경이 궁금해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찾아봤고 <마르크시즘과 윤리학>, <윤리의 진화론적 기원> 2권의 책을 읽었다. 참고로 필자는 마르크시즘과 무관하며,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글이다.

1. 윤리의 진화론적 기원 / 레오나드 캐츠 / 철학과 현실사
2. 마르크시즘과 윤리학 / 유진 카멘카 / 새밭






도덕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탄생했다.

 잘 통합된 협동적인 집단으로부터 모두 구성원들이 이득을 얻는 만큼,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걱정하고, 거미가 거미줄을 수리하거나 비버가 댐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사회를 개선하고 강화할 것이라 기대된다. 계속적인 내분, 특히 최상위 서열에서의 계속되는 내분은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갈등의 수습은 관계된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동물들이 자신의 공동체를 위하여 희생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모든 개체들이 자신들의 생존이 달려있는 사회적 환경의 질에 책임을 가진다는 말이다.

 현대와 다르게, 원시 시대의 인간은 외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대처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홀로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외부 요인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집단을 이루었다. 즉, 독립적인 "나"가 아닌, 집단 속의 "나"로 존재해야 생존이 가능하다. 바꿔 말해, 집단이 안정적일수록 개인한테 돌아가는 이익도 커진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불안정적이라면, 언제 집단이 와해될지 모르며 결과적으로 나를 향한 피해도 당연하다. 


인간의 도덕성이 사회적인 협력을 통하여 개인들에게 이득이 돌아가도록 하는 집단 구성원들 간의 암묵적인 일치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견해를 옹호하게 된다.

 <윤리의 진화론적 기원>에 따르면, 도덕은 안정적인 집단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써 탄생했다고 본다. 자신의 이익을 기꺼이 타인과 교류하고, 잠재적 내분을 막기 위해 당사자 사이의 사과 혹은, 제 3자가 중재하는 등 집단 유지를 위한 행동이 보편화되고, 이러한 행동들이 암묵적인 일치에 의해서 도덕으로 자리 잡혔다. 이런 부분에서 도덕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회 계약에 가깝다.


도덕적 제재는 주로 개인적인 자기 이익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규정된 일탈의 많은 유형들은 그러한 개인적인 이익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약탈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도덕은 집단 내에서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으로써도 시작됐다. 집단이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대응을 높여줘 개인의 이익을 보호해 준다고 한들, 집단 내부 환경에서 이익이 침해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가령, 위계질서로 인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생기는 경우, 피지배층은 자신의 이익을 빼앗길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집단 내부에서 약탈로 인해 자신의 이익을 침해받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가 공동의 규범을 정하였고 여기서부터 도덕이 탄생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공동의 규범을 이렇게 정했을 수도...?





절대적인 도덕은 없다.

이러한 도덕적 견해들은 역사적으로 생산된 것으로서, 그것은 특정 시기의 특정한 사회 집단들의 관점, 관심, 요구의 표현이다. 그러한 견해들이 과연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문제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생산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이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들에 동의하게 했는가, 그리고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그것들은 계속해서 사회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점들이다.

 <마르크시즘과 윤리학>에서 상대주의적 도덕이란 개념을 언급한다. 즉, 절대적인 도덕은 없으며, 결국 사회에 맞는 도덕만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행동과, 과거 인류가 생각한 도덕적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라고 할지라도 A 집단에서 도덕적 행동이라 보이는 것이, B 집단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작년, 스웨덴 게이트라는 밈이 탄생했다. 스웨덴 친구 집에 갔는데, 친구 엄마가 식사 시간이 됐다고 부르자 친구가 밥을 먹고 올 때까지 방에서 기다리라는 썰이다. 이는 여러 국가에서 회자됐는데, 이 모습처럼 상대주의적 도덕을 잘 대변하는 사례가 있을까? 찾아보니, 미리 계획되지 않는 당일치기 방문의 경우에만 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스웨덴 게이트의 시작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자

 앞선 책의 종합적인 관점에 따르면, 결국 도덕은 개인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법을 계산한 끝에 탄생한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계산적 성격을 가진 자를 비난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도덕이 계산적 사고에 탄생한 결론이라면, 우리는 도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부분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제껏 나는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도덕은 왜 당연한 건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노력을 기울일 때,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도덕적으로 살지 말자는 말은 절대 아니며, '도덕'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성찰해 보자는 의미다.

이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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