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5. 저녁에 아내한테 톡이 왔습니다.
'살고 싶으면 빨리와'
'오면 내 손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먼저 가족 구성을 말씀드리면
저는 (얼마전까지 통용되던) 한국나이로 하면 47세, 아내는 45세 입니다.
초4 딸(희)과 2010년생 냥이를 키우고 있는 맞벌이 부부이자 집사입니다.
축복받을 일인데 무슨 말이 필요하냐고요?
둘째가 태어난다면 저는 만으로 46세, 아내는 44세이고
첫째와는 10살 차이가 납니다.
아직 저희 부부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조짐은 보였습니다.
아내의 주기가 1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는 점,
요 며칠간 집에 오자마자 피곤하다며 계속 엎드려있기,
무척 좋아하지만 잘 참아오던 단 거를 계속 먹기,
자도자도 졸리다며 침대랑 붙어있기.
평소 아내에게 농을 잘 하는 편이라
그런 아내를 보며
'누워있는 모습이 꼭 당신 희 임신했을 때처럼 예쁘고 귀여워~'라고 말하려다 꾸욱 참았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아내가 묶고 오라며 수차례 말했기 때문입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을 했다간 며칠동안 아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후배는 수술받은 다음, 생산직에서 서비스직으로 업종 변경했다고 너스레를 떨더군요.)
결혼 전 아내는 본인 입으로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 했습니다.
딸 둘, 아들 둘 정도로 욕심낸다면서요.
저도 가능한 많이, 성별 인원 상관없지만, 살아보니까 딸 둘에 아들 하나도 괜찮을 것같다 말했습니다.
- 아내는 딸 셋 집(큰 언니와 5살, 둘째 언니와 2살 터울)의 막내였고,
저는 위로 누님 두 분(큰 누나와 3살, 작은 누나와 2살 터울) 계십니다.
아내의 전제가 '여건이 허락하면' 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저도 아내도, 주어진 조건에 경제적 문제가 들어가는 걸 알아차린 건
결혼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서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각자 어릴때만 생각하고
그냥 생기면 낳는거지, 낳으면 누가 키워주겠지, 아니면 애는 원래 혼자 크는거지 이런 안일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야지 이런 말은 결혼 전에나 할 수 있는 오판이었습니다.
2013년 보건복지부 자료에서는 한국에서 출생 자녀 1인당
대학졸업시까지 전체 양육비용을 3억원 이상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약 2억 3천만원)으로 추산하였습니다.
2009년 자료가 2억 6천만원이었고, 4년동안 5천만원 가까이 늘어난 수치입니다.
(참고.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329987 )
2023년 베이징 위와인구연구소에서는
한국에서 자녀 1명을 고등학교 졸업까지 키우는 데 드는 양육 비용을
3억 6500만원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즉 10년 전에 비해 1억 3천만원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참고.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5733 )
돈이 그렇게나 많이 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겐
서울의 신혼 부부에게 현금 3억을 줄테니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를 낳고 잘 키우라고 해도 쉽게 낳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본인이 낳고 매달 125만원씩 20년 동안 줄테니
잘 키워서 보내달라고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희가 태어나고 몇 년 후에 제가 둘째 얘기를 했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둘째가 태어나면 지금 희한테 들어가는 사랑과 노력 (시간, 정성, 돈)이
줄어들까 두렵다고.
어떤 생명이든 잉태만으로 축하하고 축복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인간 구실을 하려면 사회적 비용이 들어갑니다.
제대로 하려면 더 들어가겠죠.
아내는 현재 상태에 맞춰
우리 가족, 특히 딸의 미래를 세워놓았을 겁니다.
현명한 아내이자 엄마이니까요.
저도 40중반에 비로소 가정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됨을 느꼈습니다.
앞으론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충분히 감내할 정도의 잔잔한 물결이 치리라 안심했고요.
그런데 계획 임신이 아닌 출산이라면 또 한번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릴지 모릅니다.
불안정이 불행하거나 나쁘다는 게 아니라
현재의 안정감과 미래의 계획이 어긋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그것을 극복해내고 평온의 시간이 올 때까지는
아내도, 저도, 그리고 딸도
어떠한 미래가 올지 전혀 모릅니다.
생명 앞에서
의학적인 이유, 경제적인 이유, 사회제도적인 이유 등을 따지는
제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몇 년 전이었다 하더라도 아내에게 pros and cons를 적어서
같이 고민하자고 설득했을텐데
지금은 제 잘못이 너무 커서 그냥 가만 있습니다.
아내가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눈 앞에서 사라져줄래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장 현관 옆으로 숨었습니다.
어제 밤엔 침대에 누운 희한테 아내 몰래 물어보았습니다.
아빠랑 상상하기 게임할래? - 그게 뭔데?
내 옆에 뭐가 있다고 상상하는거야. - 그래 좋아~
음, 희 옆에 공룡이 있다면 어떡할래? - 초식동물이야? 육식동물이야?
귀여운 초식동물이야~ - 그래도 도망갈래. 무서워.
그럼 동생이 있다면? - 놀아야지.
동생은 장난감이 아닌데? - ?
니 친구들이 동생 엄청 싫어하잖아! 안 그래? - 그건 맞지.
그럼 남동생이 좋겠어? 여동생이 좋겠어? - 음...여동생? 몰라!
아직 눈치가 없는 초4 딸이 귀여워 볼에 굿나잍 뽀뽀를 합니다.
점심을 먹고 아내에게 톡을 보냈습니다.
'여보만 괜찮으면 유월이 낳고 싶어요.
태어나면 24년 3월생이 되겠네요.
제가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잘 키울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이 말 빨리 하고 싶었는데 여보가 결정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늦게 표현해서 미안해요.
여보의 결정이 어찌되었든 당신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사랑해요.'
예상했던 답변이 왔다.
아내답다.
'애는 각오와 사랑으로 크지 않아요.
돈으로 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