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번!
코로나 블루. 나도 요즘들어 그걸 겪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사는건가. 카페도 못가고, 친구도 못만나고, 맛있는 밥한끼의 즐거움도 사라지고.
그저 살아야하니 돈을 벌고. 기껏 재택근무를 위해 밀키트나 냉동식품을 사제끼는 삶. 이게 삶인가. 이게 인생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더 이러고 살아야 하는가.
그러다 오랜만에 연극 한편을 봤다. 자리에 앉을때까지만해도 갈까말까 굳이 이시국에? 하며 망설였지만... 오랜만에 배우들의 연기를 눈앞에서 지켜보며 같이 극에 몰입하는 경험은 컸다.
웃다가 울다가. 마지막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수를 더 크게 쳐주지못해서 안타까울정도로. 손바닥을 있는대로 부딪치며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연극 <오백에 삼십>은 언뜻 뮤지컬 <빨래>를 떠올리게한다. 달동네 사람들의 소박한 인생사.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않는 이야기. 뮤지컬 <빨래>가 나를 펑펑 울려서 끅끅대며 극장을 나오게 했다면, 연극 <오백에 삼십>은 깔깔 웃다가 배우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나오는 느낌이 든다.
화이팅, 잘될거예요. 라는 인사를 주고받지는 못하겠지만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냅시다' 는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위로. 그 솔직하지만 다정한 안부인사가 우울한 삶에, 큰 낙이 되어주었다.
티비만 틀면, SNS만 들어가면 온통 돈 많은 사람들의 화려한 삶만 전시되는 사회다. 갈수록 가난은 미디어에서 배척당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다. 하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진짜 세상' 에서 월세를 걱정하고, 전세를 걱정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나는 '우와' 하는 저 세계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고' 하는 현실의 이야기를 듣는것만으로도 이 연극이 너무 좋았다. 아직 연극이-어쩌면 연극만이- 가난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싶고. 현실에 발 디딛고 있구나, 싶어서.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어요, 는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웃을일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므로 누구나 똑같이 외로움과, 즐거움, 사랑을 느끼며 살겠지. 왜 이렇게 고통받으며 사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누군가 나를 죽인다고 했을때는 대뜸 '살려달라' 는 말이 나올걸 보면 니체의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몇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번!"
가난하지만, 너를 사랑하고. 가난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가난하지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는 삶.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죽음이 아니라 생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게 아닐까.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